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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자 May 05. 2020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 츠타야

장소를 만든다는 것

근 9개월 사이 나는 쇼핑몰 설계 입찰에 참여할 기회가 두 번 있었다. 항상 그렇듯 설계는 정신없이 마감하게 된다. 끝내고 보면 핫플레이스를 제안하기 위해 유명하다는 공간은 다 구현해 주겠다는 끔찍한 혼종일 때가 많이 있는데,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는 "책을 읽을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 편집샵 겸 라이브러리 카페"다. 두 번 정도 이런 프로젝트가 지나가고 보니 왜 그런지도 모르면서 아이디어를 남발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찾아봤다 책을 앞세운 공간, 그 정점에 있는 츠타야.

나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츠타야 다이칸야마에 처음 방문했다. 잠깐 둘러보고 갈 생각이었지만, 교보문고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귀한 그래픽 책들을 한 권 한 권 꺼내 보다 보니 어느새 나는 계산대 앞에 가 있었다. 지금은 들춰보지도 않고 그 책들을 책장에 고이 박아둔 걸 보니, 그 책들을 샀던 건 그곳에서 보낸 시간의 끝자락이라도 가방 속에 담아 가고픈 심리였던 것 같다.


츠타야 다이칸야마 T-SITE


서점 열풍의 진원지

츠타야 서점은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서점'으로 유명세를 타며 아시아 전역에 트렌디한 서점의 등장을 불지폈다. 기존 도서관식 분류법을 선택하기보다는 연관성 있는 카테고리 중심으로 서적과 서비스를 배치하고, 성심성의껏 도움을 줄 수 있는 컨시어지를 운영하고 있다. 연 2조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만큼, 츠타야는 한국에도 서점 열풍을 일으켰다.

우리나라만 해도 아크앤북, 스틸북스, 유어마인드와 같은 편집 서점들이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이고 있고, 대규모 몰에서는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이 선두적으로 츠타야 벤치마킹을 했다. 이제는 지하철 역사 유휴공간까지 서점을 끌어들인 걸(이수역)을 보면, 요즘 책은 그 어느 때보다 존재감이 뚜렷하다.

그렇다고 출판업계가 호황을 맞이한 것은 분명 아니다. 통계적으로도 성인의 연간 독서량은 8-9권 정도밖에 되지 않는 데다, 사람들은 서점에 오면 분위기를 둘러보고 단지 재밌는 책을 발견할 뿐, 역시 구매는 인터넷 최저가다. 어떤 인터넷 기사는 교보문고 합정점을 예로 들며 전체 1500 sqm의 40%가 핫트랙스로 운영된다는 점을 짚으며, 이제 오프라인 서점 운영이 책 판매로 유지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상당히 날카로운 기사로, 한번 읽어봄직하기에 링크를 첨부한다.) 더 이상 책으로 돈을 벌 수 없는 시대에 도대체 대기업은 왜 별마당을 만들고, 츠타야는 연간 2조 원을 버는 걸까. 부동산 개발자들에게 서점은 증명된 집객 공식이기도 하다. 도대체 왜 서점이 주가를 올리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츠타야와 CCC가 제공하는 서비스


비디오 대여점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빌려주는 곳

그래서 나는 파급효과의 진원지인 츠타야를 요래조래 좀 찾아봤다. 츠타야 체인을 실질적으로 소유하는 모회사 Culture Convenience Club, CCC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츠타야는 이제야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지만, 첫 영업은 1983년 오사카 츠타야 1호점으로 시작되었다. 그 시대의 츠타야는 음반, 비디오, 책을 대여하는 곳으로, 일본 안에만 1500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었다. 대표인 마스다 무네아키는 창업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츠타야를 서점이라던지, 비디오 가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기획을 팔고 싶었던 마케터였다. 다음은 마스다 무네아키의 말이다.


어떤 기획을 낸다고 했을 때, 기획서를 들고 "이 기획을 사지 않겠습니까?"라고 떠들며 사방팔방 뛰어다닌다면 누가 기획을 사줄까. 그래서 나는  "제가 생각한 기획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할 수 있는 샘플이 필요했다.
_라이프스타일을 팔다 中


무네아키는 라이프스타일을 탐색할 수 있는 장소를 기획하고 싶었다. 기획을 하려면 역사와 시대의 흐름부터 봐야 하나보다. 무네아키 아저씨는 본인의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밝혔다.


다이칸야마 츠타야 이전의 점포들


일본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가난을 딛고 1980년대에 부유한 장년층이 되었다. 1980년대는 두둑한 호주머니, 그리고 문화소비에 대한 그들의 강력한 욕구가 음악, 영화, 도서, 패션 등의 산업에 박차를 가해주던 시기였다. 꼼 데 가르송, 소니 워크맨도 이 시기에 출현했다고 하니 과연 그렇다. 언제까지나 보리밥을 먹고 짚신을 신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다음에 사는 물건은 좀 더 좋은 것, 남다른 것이길 원했을 것이다. 그 시기에 영화와 음악, 소설 등은, 무엇을 소비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선진 세계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창구 역할을 했다. 젊은 시절의 무네아키는 문화콘텐츠가 폭발적으로 소비되는 것을 보고, 이것이 라이프스타일을 찾기 위한 사람들의 욕구라고 생각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라이프스타일 콘텐츠의 ‘소유를 대행해준다’는 기획으로 전국 1500개 비디오 대여점 프랜차이즈 왕국을 세우기 이르렀다.


꼼데가르송 창립자 레이 가와쿠보, 그리고 1982 파리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 디자인


정보화시대에서의 생존

바야흐로 20년이 지나, 이제는 구글이 온라인 도서관을 만들고, 아마존이 도서를 최저가에 초고속으로 유통하고, 넷플릭스에서 클릭 한 번에 코퀄리티 영화를 스트리밍 하는 시대에 내가 아는 비디오/책/음반 대여점은 모두 망했다. 그런데도 츠타야는 여전히 건재한다. 츠타야는 그럼 어떤 기획을 어떻게 팔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츠타야는 여전히 라이프스타일을 팔고 있고, 공간을 빌려주는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다. 

무네아키의 타깃은 여전히 베이비부머들이다. 일본의 베이비 부머들은 왕성한 문화욕구로 일본 라이프스타일 산업을 꽃피운 프런티어들로, 무네아키는 이를 두고 프리미어 세대라 부른다. 퇴직 후 여생을 편안히 보내겠다는 전 세대와는 달리 (그리고 늘어난 수명으로 인해), ‘나 아직 한창이라고!’라고 외치는 세대로 보고 있다. 무네아키는 비디오 대여 이후의 사업으로 공간 플랫폼 사업을 기획한다. 멋진 프리미어 세대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그다음을 준비하는 장소를 기획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다이칸야마 츠타야가 시작되었다.


마스다 무네아키가 말하는 프리미어 에이지? 한국어로 꽃중년. 왼쪽부터 타카히로 키노시타, 요시마사 호시바, 하루오 스즈키


츠타야는 단순히 멋진 인테리어와, 힙한 큐레이션으로 이루어진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서점이 아니다. 츠타야는 본디 베이비 부머들이 항상 비디오, 책, 음악을 빌려다 보던 친숙한 기업이다.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 베이비 부머들이 은퇴 사회에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안정적인 시장 수요를 의미한다. 또한, 모델로 삼고픈 멋진 중년들이 오는 장소라면 청년들도 이곳으로 와서 그 에너지를 주고받고 싶어 할 거라는 것까지 계산된 것이다. 츠타야 서점은 사람들이 와서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몰입에 필요할 콘텐츠와 서비스를 그물망처럼 촘촘히 엮어 소비의 덫을 놓아뒀다. (필자도 덥석 걸려들었다)

이 서점은 책을 매개로 다른 상품을 연계하면서 종합 유통을 하고 있는데, 잡화, 가구, 각종 문화행사, 여행상품, 카페, 레스토랑 등도 책을 매개로 이어지는 구조다. 백화점이나 쇼핑몰 같은 복합 문화공간인 셈. 이제보니 츠타야의 모회사 Culture Convenience Club은 일본어로 편의점을 뜻하는 콘비니(Convenience Store)처럼 라이프스타일을 편의점처럼 유통해주겠다는 뜻으로 들리는 것 같다.

복합 문화공간이기 때문에 이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타임마케팅이기도 하다. 공간에 오래 머물수록 재화를 구입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츠타야는 악어새를 키운다. 바로 스타벅스다. 츠타야에서 서서 공간을 이용하는 것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좌석에 앉아서 이용하려면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구매해야 한다. 매장에서 편안하게 머무를 권리를 판매하고, 이후에 발생하는 1차, 2차, 3차 소비를 유도하는 방법이다. (츠타야 수익구조에 대한 재밌는 글을 첨부한다) 매력적인 공간을 유지하는데 치밀한 룰이 없을 리 없다. 츠타야의 포인트 카드 겸 신용카드인 T카드 회원만 6700명에, 다이칸야마점만 도서 매출 1109억 엔이다. 츠타야는 생존을 넘어 유통과 부동산을 흔드는 생태계 교란종이다.



결국 인문학

책이 있는 곳은 매장의 체류시간을 늘려준다는 점에서 어느덧 복합 문화공간의 공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객은 원하는 책을 읽고, 매장은 매출을 더 올리면 서로 윈윈 아닌가? 하지만 필자는 별마당 도서관 같은 거대 기획을 보면서 어딘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획기적으로 코엑스 매출을 올리기는 했지만, 어설프게 외양간 고치기 급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특히 거대한 기둥에 박힌 가짜 책들을 보면 왠지 알맹이도 그렇게 생겼을 것 같다.

앞서 필자는 츠타야 서점의 수요, 전략과 같은 딱딱한 이야기만 했지만, 별마당 같은 국내 기획과 비교해 보면 츠타야 서점이라는 장소가 주는 힘은 역시 철학에서 오는 것 같다. 마스다 무네아키는 사업을 전환하면서 ‘IT혁명시대에 필요한 장소란 어떤 공간인가?’부터 고민했다. 그는 삶을 ON과 OFF로 나눈다면, ON은 돈을 받기 위한 시간으로 타인에 신경을 쏟고, OFF는 돈을 쓰기 위한 시간으로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을 찾기 위한 시간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IT혁명은 ON-OFF를 무너트렸다. OFF의 시간이 ON에 침범당하는 현실에서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히 OFF 하기 위한 물리적 환경일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으로 CCC가 다이칸야마에 만든 것은 ‘숲 속 리조트’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것은 거대 자본이 만든 급조한 패스트푸드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다. 여러 권의 서적으로 출판될 정도로 깊이 있게 짜인 파인 다이닝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오롯이 잠수할 수 있는 곳이다.



서점이라는 아이템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일명 핫플들이 떴다가 지고 있다. 그 트렌드의 진원지에는 츠타야가 있었다. 그런데 그 장소들은 츠타야만큼의 경험을 주지 못했고, 물론 기억에도 잘 남지 않았다. 요 근래의 핫플레이스들은 조금 다른 콘셉트를 내세우며 입장료나 비싼 커피값을 요구하며 콧대만 높거나, ‘나 좀 다르죠? 힙하죠?’라고 애걸복걸하는 케이스들이 많다고 느껴진다. 진정으로 돈을 쓴 값어치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쉽게 만나 지지 않는다(아, 최근 갔던 청담동 소전서림은 회원권 끊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이는 기획력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츠타야가 가진 일본스러운 치밀한 기획은 핫플레이스를 넘어 일본의 기획 수준을 대표할 수 있지 않을까? 국내에는 JOH 같은 회사가 그런 기획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최근 카카오에 편입되면서 조용해졌다(더 큰 판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이 뜨겁다. 상승한 부동산 가격이 버블로 판명되지 않으려면 문화적 자본 역시 갖추어야 할 것이다. 화제가 된다니까 다들 한 번씩 다녀가고 마는 곳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 줄 수 있는 곳이 체력을 갖춘 곳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소프트웨어와 운영해나가는 방식, 그리고 저변의 경영철학이 펀더멘털이 되어주는 것 아닐까?



참고자료

- 서점 부활? 누가 거짓을 출판하나 http://www.thescoop.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775

- 부업으로 본업을 살린 센비키야와 츠타야의 기정 전략 https://outstanding.kr/kiyataya20191119/

- 서점, 복합 문화공간으로 발돋움하다 https://froma.co.kr/423

- 지적 자본론, 마스다 무네아키, 민음사

- 취향을 설계하는 곳, 마스다 무네아키, 베가북스

- 라이프스타일을 팔다, 마스다 무네아키, 위즈덤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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