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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IGE Jan 02. 2021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무소속 페이지 (not-empty paige)

천장을 멍하니 보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자각하고 몸을 바삐 움직였다. 그가 저녁을 먹고 온다는 연락을 받았고 덕분에 나는 조금 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돈을 벌지 않았다는 불안감은 여전한 늦은 밤이었다. 그렇다 한들 당장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책을 읽을까 그림을 그릴까 침대에 누워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로의 사정을 잘 아는 오래된 친구였다. 처음에는 안부차 연락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글 쓰는 일 말고, 뭐라도 하면서 돈은 벌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일을 할 생각이니 같이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실은 요 몇 주 전에도 카페 매니저 수업을 받아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이 있었다. 돈을 벌지 않고 놀고 있으니 다들 걱정해준 마음에 건넨 제안이라 생각되어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라 오래도록 말을 고르고 힘들어했었다. 카페 매니저 일을 어렵게 거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해야 하는 거절 앞에서 내 안에 작은 균열이 생겨버렸다.

벌지 않고 쓰는 삶을 목표로 한 퇴사는 아니었다. 8시간 이상 내 시간을 내어주는 일 말고, 내 주변을 이루는 것들과 시간을 보내며 집과 반려견을 돌보고 싶었던 마음으로 내린 결심이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고 하면 수단이 되는 일이 내 시간에 너무 많이 할애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4시간 내의 재택근무를 알아봤던 것이고. 이런저런 생각이 가닿는 동안 재택 아르바이트해서 얼마를 벌었냐는 물음과 그 금액으로 생활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이어졌다. 갑자기 목이 썼다. 돈을 버는 일에 벗어나 시간을 쓰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는 말을 설명할 길이 없어 여러 모양의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온라인 일을 하지 않겠다는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와인을 찾았다. 냉장고 깊숙이 넣어둔 치즈를 두어 개 꺼내고 와인잔에 와인을 따랐다. 와인을 따르는 동안 내가 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치즈를 조각내는 동안 내가 하려던 것은 있었나 싶었다. 


불현듯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던 때가 생각났다. 영어라고는 fine, thank you 만 할 줄 아는 내가 연고도 없이 캐나다에 가서 살며 무력함을 이겼던 건 영어고 뭐고 하루를 살아냈다는 안심이었다. 스시집 아르바이트에서 영어를 못해 이주만에 잘렸을 때도, 돈이 없어 거실에 살면서 건조기가 뿜는 스팀을 들이마시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도망치지 말자는 결심이었다. 허지웅 책 《살고 싶다는 농담》에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그때 왜 나는 외국에 와서 현지인들과 친해지지도 못하고 홈파티 한 번을 하지 않을까 하고 물었다면. 대체 왜 나는 단골손님들과 영어로 유창한 대화가 되질 않는 것일까 하고 내가 생각했던 결론에 사로잡혔더라면. 스타벅스에 가서 직접 주문해서 커피를 손에 받던 순간도, 언제 잘릴지 모르며 버텼던 두 번째 스시집에서 받던 첫 페이 체크도 내겐 없었겠지. 


와인을 몇 모금씩 마시면서 생각을 고치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고 생각하기로, 요가도 사바아사나 자세(송장자세)가 있지 않나. 서른 해를 넘겨온 내 시간들에게도 불필요한 긴장을 풀 시간이 필요하지. 삶이 나에게 모진 것 같아도 이럴 때는 고맙게도 책이 내게 닿는다. 괜찮다고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쉬는 동안 무엇을 하고 있냐는, 무엇을 해왔냐는 결론에 사로잡히지 말자. 내게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지지 않도록 애쓰는 1년을 보내면 되는 거지. 내가 결심한 1년 동안, 돈을 버는 일이라면 내게 중요한 것들에 최대한 무리가 가지 않는 일로 결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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