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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결 Sep 08. 2021

트롤리 딜레마. 희생.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만인을 구했다.

하나의 생명을 얻으려면 다수의 희생이 필요하다.

출생에는 가장 가까이에는 출산하는 엄마의 희생이 있고, 아빠와 가족들과 의료진의 희생과 수고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생명이 그 본질을 잃으면, 다수가 함께 죽어간다.

내 욕심으로 한번 눈 감은 것이 거짓과 죄악을 낳고, 나아가 모두가 눈감고 넘어가는 추악한 관습을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다시 되돌려 말해보면 나 하나 희생하면 다수가 살 수 있다.


이 프레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상황이다.

의사결정 심리학 수업에 '딜레마' 챕터가 있었다. 딜레마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딜레마(Dilemma)는 두 가지 옵션 중 각각 받아들이기 어려우거나 불리한 어려운 상태를 말한다. 


여러 딜레마 상황 중 수업에서 배울 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예시가 있었는데 바로 트롤리 딜레마이다. 

수업 중에는 내가 그 상황의 구경꾼 또는 관찰자 입장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한다. 내 손에 내가 아닌 1명의 목숨 또는 다수의 목숨이 반드시 달려있다는 괴로움이 있다.


그랬기 때문에 반드시 한 명 이상의 목숨을 희생시켜야 하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딜레마 상황을 놓고 토론을 하다 보면 "그래도 많은 목숨을 살리는 것이 낫지 않겠냐" 파와 "그럼 한 명의 목숨은 죽여도 되는 것이냐" 파의 분분한 논쟁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논쟁은 학생들 간의 논쟁이면서도 학생들 자신 속에서도 어느 하나의 답을 내리지 못한다. 


하지만 실전 인생에서는 내가 완전히 방관자로서 개입하지 않고 누군가의 목숨들을 저울질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보다는 나도 그 상황의 1인인 경우가 훨씬 많다. 트롤리 딜레마에 비유하자면 나 자신이 선로에 누워있거나, 또는 트롤리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더 많은 셈이다. 그렇다면 의사결정은 더 간단해질까?


트롤리 딜레마를 처음 접할 때 일부 학생들은 "제가 대신 선로에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 살리면 안 될까요?"라는 답을 하기도 한다. 나도 그런 입장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나를 희생해서 누굴 살리겠다는 매우 이타적인 대답이었지만, 그 속마음에는 누군가의 희생을 결정함으로써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싫고, 굳이 오래 살고 싶지도 않은 그런 심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새로 깨닫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런 답을 한 것은 온전히 희생하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희생이란 내가 죽는 것인데, 단순히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누굴 대신해서 죽는 것은 내 자존심을 버리는 것보다는 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살면서 꼭 해야 하는 것으로 '죽는 것'과 '자존심을 바닥까지 다 버리는 모든 행동을 하는 것'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죽는 것'이 더 쉽게 느껴진다. 다시 말하면, 목숨을 던지는 것만큼 동등하게 힘든 것은, 아니 어쩌면 더 어렵고 하기 싫은 것은 내 원수 앞에 가서 무릎 꿇고 비는 것이거나, 내가 더 잘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 가장 비천하고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것이거나, 절대 용서할 수 없거나 용서하지 않을 상대에게 용서한다는 말을 하거나 심지어 그에게 내가 미워했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최악인 상황들이다.


그런데 그런 희생이 나와, 가정과, 친구와, 세상을 살린다.


죽을 때까지 용서하기 싫은 사람을 용서했을 때, 그곳에서부터 흐르는 사랑은 가정을 살린다. 그리고 가정이 살아나면 친구들과 나라가 살아나고 세상이 살아난다. 영혼이 죽어가던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트롤리 딜레마 상황 속에 있다면, 나 한 사람을 희생하는 선택이 정답임을 배운다. 각자의 희생은 그 주변에 더 이상 죄가 흐르지 않게 하는 최후의 방어선을 세우는 것이다.


한 사람의 관심으로 비뚤어지던 아이들이 방향을 바로 잡는다.

한 사람의 위로로 오늘 죽으려던 사람이 내일을 살아간다.

한 사람의 나눔으로 굶주리던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얻는다.

한 사람의 기도로 나라가 살아난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만인이 구원을 받았다.


이런 원리는 마치, 한 사람이 마스크를 잘 쓴 덕에 주변의 10명이 코로나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보이지 않지만 그 효과는 반드시 있다.


희생하는 한 사람이 왜 나여야 하냐는 질문을 던지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한 사람이 나일 수 있음이 축복임을 알려주고 싶다.


이번에 심폐소생술 수업과 뉴스를 통해 코로나 소식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생명 하나 살리기에 정말 많은 인력과 힘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한 명의 감염자를 치료하기 위해 5명, 10명의 의료 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귀하고 중요한 인생들을 나 하나가 희생해서 10명을 살리고 100명을 살릴 수 있다면 

내 삶은 얼마나 값진 인생이겠는가.

죽기 전에 돌아본 삶에 여러 생명들이 피어나고 있다면, 인생의 마지막 길도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트롤리 딜레마에서 희생하는 한 사람.

그 사람이 내 삶이고 내 인생이 되길,  그리고 오늘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기를 늘 깨어 구할 수 있게 이 글을 남겨본다. 희생하기 싫어하는 이기적인 마음과, 희생하면 호구라고 조언하는 세상 속에서 이 결심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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