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 음악 작업 일기
분명 시작은 '잔잔한 곡 만들어야지'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기승전결이 확실한 음악이 완성되어 있다.
어릴 적부터 그런 음악을 좋아해 오긴 했다. 백조의 호수처럼, 잔잔하게 시작해서 전개되다 후반부에 폭발하며 전율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곡.
직접 그렇게 여러 악기를 쌓아 곡을 만들 수 있게 되었을 땐 얼마나 즐겁던지, 새로운 악기를 추가할 때마다 만족감은 배가 되니 참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이 곡은 평화롭고 잔잔한 분위기로 완성되어야만 한다. 편곡에 앞서 폭주를 막기 위해 제어 장치를 만들었다.
1. 메인 악기는 피아노, 나머지는 어쿠스틱 악기
2. 잔잔하고 차분하게, 느린 호흡으로 전개될 것
3. 전반적으로 평온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무드를 유지할 것
꽤 젠틀해 보이는 제어 장치는 사실 이런 의미다. 1번은 괜히 메인 악기 바꾸지 말고 신디사이저 넣지 마라, 2번은 속도 높이거나 급전개 하지 마라, 3번은 갑자기 비극적인 분위기로 만들지 말고 빌드업하지 말고 참아라. 이렇게라도 정해두지 않으면 부글대는 빌드업의 욕망에 휩쓸려 극적인 노래로 변질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장치를 만들어둬도 절제는 쉽지 않았다. 편곡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폭주해버린 거다. 왜 필요하지도 않은 베이스 기타를 추가해 화려한 라인까지 짜 넣은 건지... 자괴감을 느끼던 중, 우연히 김은숙 작가님의 인터뷰를 보고 위안을 얻었다.
로코 드라마만 만들다가 처음으로 장르물 '더글로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연애 서사를 넣으려는 본능을 억제하기가 힘들었어요. 덕분에 문동은과 주여정의 연애 장면을 많이 썼다가 지우길 여러 번 반복했죠.
- 김은숙 작가 '더글로리' 제작발표회 中
20년 넘게 집필을 해오신 작가님도 어려우시다는데, 내가 어려워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미련 없이 베이스 트랙을 지웠다.
어서 편곡을 끝내고 싶다. 곡 작업이 길어진다고 좋은 곡이 되긴커녕, 오히려 사소한 것에 의문을 품으며 방향성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곡의 본래 가치를 긍정할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으니 서둘러야겠다.
사찰음식 같은 곡이 되었으면 싶다. 자극적인 입맛에 길들여진 이들에겐 무가치하더라도, 재료 본연의 담백함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슴슴한 평온을 가져다주면 충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