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내 인생 통증 역사, 교통사고만 두 번
올초, 3월의 어느 수요일, 레슨이 없어 하루 쉬는 날이었다. 하늘은 파랗고 봄바람도 시원해 E와 함께 산에 다녀왔다.
집에 오는 길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코도넛을 사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 곧 멈출 줄 알았던 차량 다마스가 나를 ‘퍽’ 하고 밀쳤다. 내 오른쪽 상체를 강타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119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옮겨졌고 몇 가지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통증이 시작되었다.
숨만 쉬어도 오른쪽 귀 뒤에서부터 오른쪽 어깨, 날개뼈, 팔꿈치, 오른쪽 등, 허리, 골반이 아팠다. 뒤척일 수 없는 통증에 자다가 일어나 진통제를 맞고, 움직일 수 없는 어지러움에 누워있기를 일주일 정도했다. 의사는 “차량과 차량이 사고가 나도 몸에 무리가 가는데, 이건 맨몸으로 맞았으니 사고의 충격을 몸이 고스란히 다 흡수한 거예요. 오래 갈 겁니다.” 라고 했다. 물리치료와 약을 꼬박 꼬박 챙겼다.
퇴원을 하는 날 남편과 아이들이 데리러 왔다. 보고 싶었다고 안기는 아이들, 집에 가니 배고프다고 밥을 달라고 성화다. 집으로 돌아와 밥을 해먹고 치우는 일, 세탁기 돌리고 옷 정리, 책상 정리, 청소하기 등 집안에서 자꾸 몸을 쓰게 되니 통증이 잠잘 날이 없었다. 출근을 해서는 동작 시범을 보인다. 엎드린 자세에서 양손바닥을 바닥에 대고 엉덩이와 무릎을 떼어내는 플랭크를 하거나, 고무 밴드의 양 끝을 잡아 뒤로 당기는 동작, 4킬로그램짜리 캐들벨을 들고 동작하면 어깨부터 골반까지의 통증이 살아난다. 상체 오른쪽 전체의 통증으로 몸이 오른쪽으로 말리는 기분이 든다.
비가 오면 몸이 많이 아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해는 장마가 유독 길다. ‘날궂이(날씨가 흐리면 어기저기가 아픈 상태)하는 거 보니까 내일 비가 오려나 보다.’ 했던 회원의 말을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비가 오기 전이나 오는 날이 되면 오른쪽 귀 뒤에서 부터 어깨, 등, 허리, 골반이 사고난 다음날처럼 아프다. 그럴 땐 목욕탕에 가서 따뜻한 물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 물리치료를 가서 뜨끈하게 찜질하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12년간 재활전문 필라테스 강사라고 하면 늘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사람들의 몸을 도우며 살았을 거라 생각들 하시지만 나의 ‘골골한 몸’ 이야기를 들어 보시라.
나의 20대는 교통사고로 매일 밤 울던 시간이었고, 임신으로 얻은 연골연화증, 타고난 일자척추, 시대를 앞서나간 거북목과 손목골절을 겪은 몸이다. 지나고 보니 여기가 괜찮아지면 저기가 아파졌다. 통증해방을 위해 약을 먹어가면서 운동했던 나의 경험이, 12년 간 재활전문 필라테스 강사로 일하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위로와 희망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
대학생 때 농구동아리 멤버였다.
동아리 활동으로 농구가 익숙했던 난 2학년 때 교양수업으로 농구를 했다. 시험을 앞두고 수요일마다 친구들과 슛 연습도 하고 서로 패스를 하며 공을 주고 받았다. 멀리서 패스하는 공은 속도가 빠른데 운동신경이 뛰어난 나는 놓치지 않고 잘 받아냈다.
그런데 시험을 일주일 앞둔 날, 오른 손목이 붓고 손을 사용할 수가 없어 병원을 찾았더니 골절이라고 했다. 4주 동안 깁스를 하게 되었다.
오른 손잡이였기에 4주간 모든 것을 왼손으로 해야 했다. 왼손으로 글을 쓰고, 왼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화장을 했다. 왼손으로 사는 건 일주일 정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깁스 안에서 차오르는 땀 때문에 가려움이 극심해졌다. 오른손을 이용하지 않는 생활은 점점 개운치 않고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4주가 지나 의사로부터 뼈가 잘 붙었다는 말을 듣고 그간 못한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엎드린 상태에서 양손이 바닥을 짚어 상체를 세우는 자세, 앉아서 양손바닥으로 내 몸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연습지만 이전처럼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수련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더 열심히 움직였지만 요가를 하고나면 손목이 시큰하고 너덜너덜한 느낌이 들어 손을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병원에서는 며칠 소염제를 먹으며 쉬고 운동은 계속해도 좋다고 했지만, 자꾸 아팠고 요가 실력은 늘지 않았다. 안 아픈 날보다 아픈 날이 더 많았다. 요가는 거기서 그만 두게 되었다.
대학교 3학년 가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민사소송법을 강의하는 한 교수님과 제자들의 모임에 참여한 날. 횟집과 와인 바까지 이어진 밤 시간의 그 따뜻한 모임을 마치고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귀가하는 길이었다.
택시 뒷자리에 선배와 나란히 앉았다. 오른다리를 위로 올려 꼬고, 상체는 반쯤 선배를 보고 앉았다. 자정이 넘은 서울의 도로는 한산했다. 우리가 탄 택시는 가을밤을 시원하게 달렸다. 눈 깜짝 사이 oo터널을 빠져나오는데 쾅! 큰소리를 내며 택시가 가로수를 박았다. 순간 몸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조수석에 부딪혔다. 꼬았던 다리를 손으로 풀었다. 술기운이었는지 우리는 몸에 이상이 없다고 느껴 ‘별일이야 있겠어?’하고 다른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교통사고가 났지만 내 몸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 들어와 잠에 들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허리부터 다리까지 저리다는 걸 알게 되었다. 허리가 아파 돌아누우려 할 때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통증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119를 불러야하나 어느 병원으로 가야하나 고민하다 날이 밝았다. 결국 다음 날 큰엄마가 사는 동네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엑스레이와 MRI를 포함한 여러 검사를 했다. 의사는 ‘큰 이상이 없으니 며칠 더 두고 보자’고 했지만 나는 아팠다. 누워 있으면 허리가 후들거리고, 앉아 있으면 발끝까지 찌릿했다. 증상이 없어지지 않아 한 달 남짓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학교도 다녀야 하는데 더 이상은 안되겠다.’ 통원치료를 결정했다.
주변에서 추천해 주는 통증 전문 치료를 찾아 다녔다. 연신내에, 남대문 시장에 허리 아픈 사람들은 다 다닌다는 통증의학과를 다니고, 청량리에 침을 잘 놓기로 유명한 한의원도 다녔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병원을 오고가는 길에서 쳐다보게 된 사람들. 건강하게 바로 서서 다가올 방학 이야기를 나누는 또래들, 공연을 보기 위해 줄서 있는 모습의 사람들 모두 아름다워 보였다. 나만 빼고 모두가 건강해 보였다.
평생일 것 같은 이 통증, 난 이런 몸으로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나 있을까?
나의 사고와 통증은 여기서 끝나질 않았다.
출산을 겪은 여느 여인들처럼 나의 출산에도 통증 이야기가 있다.
둘째 출산 이야기. 자궁이 열리길 기다리며 산통을 참고 있는데 갑자기 왼쪽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걸어 다녀야 아기가 빨리 내려온다는 간호사의 말이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제자리에 일어서 있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출산도 산후조리도 무사히 마쳤지만 그 이후 자주 찾아오는 왼쪽 무릎 통증은 한 번 시작되면 몇 날 몇 일 계속 되었다.
병원에서는 무릎 연골연화증이라고 했다. 그냥 두면 퇴행성관절염이 된다고. 살을 빼고 운동하라고 했다.
무릎 연골연화증은 이후 내 육아의 훼방꾼이었다.
엄마와 함께 언덕 위에 올라 뛰고 싶은 아이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아이 따라 뛸 때 ‘우지끈’ 통증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집도 하필 3층 주택이어서 엘리베이터 없이 아이를 키우는 일이 곤욕이었다. 유치원 차에서 낮잠 들어 온 아이를 업거나 안아서 주택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통증이 심한 날엔 엄마와 언니가 와서 아이의 하원을 도와줄 만큼.
아이를 키우는 일에 어찌 무릎만 아팠으랴.
아이를 키우면 고개를 숙이고 할 일이 참 많다. 기저귀를 갈고, 작은 아이라지만 깨나 무거운 아이를 들어 목욕을 시키고, 아이와의 놀이하는 시간 거의 전부, 목 주변의 통증을 불러 일으키는 자세들뿐이다. 목이 등에서 뽑힐 것 같이 아프고 오른쪽 날개죽지에 불이 난 것처럼 아팠다.
둘째가 태어난 지 50일 정도 됐을 때. 잘 때 ‘만세’ 자세로 자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남편의 말을 듣자마자 ‘내가 그렇게 잔다고?’ 하며 바닥에 누워봤다. 차렷을 하고 있으면 날개죽지에 열이 나듯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팔을 옆으로, 위로 들어 올리니 몸의 고단함이 풀리는 듯 한결 편했다. 그래서 잠을 잘 때 나도 모르게 편한 자세를 취했나보다.
동네 신경외과를 찾았다. 의사는 목뼈 5번과 6번 사이의 간격이 좁아져 있다고 했다. 주사 치료를 시작했다. 큰 주사기로 목, 어깨, 등 주변을 쑤셨다. 치료를 받고 나면 그 자리엔 피투성이었다. 일시적 통증완화책인 것 같은, 이 무서운 주사치료를 매번 그만 두려했으나 아플 때마다 노예가 된듯 주사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치료를 받아도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면 기저귀를 갈고, 칭얼대는 아기와 놀고, 이유식을 만들었다. 통증이 가실 날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들이 없는 시간 친구와 집앞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데 통증이 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낮은 높이에 있는 아이들에게 눈맞춤을 하던 일상에서 벗어나 시선을 조금 멀리 두거나 혹은 나와 같은 눈높이에 있는 대상을 볼 때 아프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고개를 드는 것만으로도 덜 아프다는 걸. 스트레칭이나 찜질, 고가의 치료까지 가지 않아도. 내 몸이 더 괜찮아질 수 있는 방법을.
그 날 이후로 난 설거지를 하다가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를 종종 보게 되었다. 아이들과는 집밖에 나와 활동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시선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말이다.
통증은 내게 소중한 경험이자 자산이 되었다
필라테스 회원 분들이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새로 온 선생님이랑 운동 하고나서 무릎이 너무 아파요."
"무릎 꿇는 동작을 많이 해서 필라테스 더 못하겠어요."
예전의 나라면 무슨 말을 했을까. "필라테스에는 7가지 시작 동작이 있는데..." 라며 일장연설을 했을까. 아니면 "그 선생님한테 이야기해볼게요." 하고 상황을 모면했을까.
나는 이제 이렇게 대답을 한다.
"젊어서 그래요. 딱 봐도 어리잖아. 애도 좀 낳아보고, 날궂이도 좀 해봐야지 '아이고 무릎 아프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알죠!" 웃자고 한 얘기였는데 다들 폭풍 공감하며 웃는다.
사실 이 말은 새내기강사시절 나를 떠올리며 한 얘기다. 나도 소위 아가씨 때는 예쁜 동작, 다양한 동작을 많이 했다. 무릎이 아플 땐 매트를 접어서 운동하면 진짜 안 아픈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매트를 아무리 많이 접어도 무릎을 대면 아프다.
두 번의 교통사고와 임신, 출산, 육아로 고스란히 얻게 된 나의 ‘통증’. 통증은, 내가 일터에서 회원들의 몸 한 군데 한 군데를 온전히 바라보고, 그것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