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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Jul 16. 2020

7월 31일, 59일 차, 파리

화려하게 타들어가는 도시 파리입니다

전날 밤, 새벽 두 시가 되어서나 잠이 듭니다. 푹 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여섯 시 반에는 일어나야 하는 일정이 너무나 서글픈 아침입니다. 굳이 파리로 서두를 필요는 없었을 텐데 저는 어째서 이른 아침의 기차를 잡았을까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짐들을 정리한 다음, 늦지 않게 서둘러 길을 나섭니다. 해가 뜬 지 얼마 안 되어선지 아직 떠오르는 햇살이 어둑한 리옹의 아침 풍경은 잠에 취한 생각들을 깨워옵니다. 설설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하고 걷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합니다. 

예술적 감각을 엿보는 리옹의 모습

역에 도착한 저는 파리로 떠나기 위한 플랫폼을 확인합니다. 다른 기차와는 달리 제가 타려는 테제베의 경우 플랫폼 출입구에 따로 게이트와 안내원이 보입니다.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열차다 보니 보안을 확실히 한다는 인상입니다. 잊지 않고 미리 뽑아온 예약 티켓의 QR코드를 바코드 기기에 인증하고 게이트를 통과합니다. 혹시나 못 타면 어쩌나 싶었던 걱정이 무색하게 무사히 테제베에 안착합니다.

보안이 철저해 보이는 테제베

고속열차의 대명사라는 테제베는 다른 고속열차에 비해 어떨까 기대하면서 타봅니다만, 세상 이렇게 불편할 수가 없습니다. 일등석인데도 비행기 이코노미 석처럼 너무 좁고 불편합니다. 앞사람이랑 발이 계속 부딪쳐서 인쪽으로 바짝 붙어 앉아야 하고, 화장실을 가려면 복도 쪽 사람이 자리를 일어나서 비켜주어야 합니다. 심지어 부가적인 서비스도 없습니다. 이딸로는 쿠키와 음료를 주고 이체에는 초콜릿을 주는데 테제베는 좁은 좌석뿐입니다. 테제베를 모델로 KTX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좌석 구조를 이렇게 안 만든 것은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좁은 공간에서 꼬박 두 시간을 보내고서야 파리에 도착합니다. 비가 조금씩 내리며 선선한 날씨에 파리의 첫인상은 과연 대도시라는 생각입니다. 번쩍번쩍한 마천루들과 함께 곧게 뻗은 도로들과 도로를 따라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이 잘 설계된 도시 계획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예약한 호스텔이 14구 구석에 있어 중앙역으로부터 걸음걸이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입니다만, 시원시원하게 뻗은 거리를 마냥 걸어보기로 합니다. 날도 선선하고 길에 거치적거리는 것도 없다 보니 걷는 길에, 정말 오랜만에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봅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고 사색의 계절이라는 말이 괜한 게 아닙니다.

아무 생각없이 걷는 파리의 거리입니다

호스텔에 도착해서 피곤한 몸을 뉘이고 한 숨 자고 나니 벌써 오후 4시가 다 되었습니다. 숙소 위치가 조금 구석에 있는지라 파리 중심지에 가긴 좀 그렇고 가까운데 볼 게 있나 찾아보니 근처에 카타콤이 있습니다. 예전에 오스트리아 빈에 갔을 때 슈테판 대성당 지하의 카타콤을 놓친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었는데 그래도 쿨하게 넘어간 이유가 바로 파리의 카타콤 때문입니다. 통로의 길이를 다 합하면 300km가 넘는 데다가 묻힌 뼈가 600만 구에 달한다는 유럽에서 가장 큰 지하무덤이자 세계 13대 마경 중 하나입니다. 지하 통로가 너무 방대하고 복잡한 나머지, 통제를 피해 모험을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실종된 곳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관광객에겐 1.5km의 짧은 구간만 공개되어 있어 뼈 무더기 속에 시체 하나를 추가할 일은 없을 듯합니다.

카타콤으로 들어가기 위한 대기줄

카타콤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생각보다 평범해 보입니다. 그냥 작은 지하철 역사처럼 생긴 건물이 카타콤으로 통하는 입구라고는 상상이 잘 안됩니다. 통로에는 인도를 따라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저도 기다려보기로 합니다. 선선한 날씨에 폰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카타콤 입구엔 현재 카타콤에 있는 사람의 수를 카운트로 보여주는데, 겨우 200 명 밖에 동시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지하철 개표구 같이 생긴 입구를 지나자 저를 맞이한 것은 빙글빙글 돌아 내려가는 계단입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데 한참을 돌고 돌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계단의 끝에서 시작하는 첫 방은 본격적으로 카타콤에 들어가기 앞서 카타콤의 역사와 정보들을 간단하게 브리핑하는 입구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어두컴컴한 지하 통로가 보입니다.

내부 입장객 카운트
어디까지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입구
시작은 간단한 브리핑으로 시작합니다

겨우 키가 닿을 만한 좁은 벽돌 통로를 따라 걷다 보면 벽돌에 새겨진 이니셜로 보이는 문자와 숫자들이 보입니다. 지하를 뚫는 공사를 할 때 새긴 내용들입니다만, 꼭 지하 미궁에서 탈출하기 위한 비밀의 단서들처럼 보입니다. 들어갈수록 반듯했던 통로가 점점 거칠어져 이곳저곳이 허물어지고 벽의 글귀들에서 섬뜩함이 느껴집니다. 카메라를 들고 앞서 가는 두 청년은 꼭 영화 속에 나오는 모험가처럼 진중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이리저리 찍고 있습니다. 추리소설에서 보면 이런 캐릭터들이 꼭 사건에 휘말려 들면서 추리극이 시작하는 데, 혹시나 하는 재밌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농담처럼 웃어 넘기기엔 분위기가 정말로 그럴듯합니다.

지하 통로와 벽에 새겨진 글귀
마치 다큐멘터리 리포터가 된 듯이 분위기를 잡는 두 친구들

통로의 3분의 1쯤 지나니 다시 설명의 방이 보입니다. 유골의 모습과 설명, 카타콤의 지도와 묻혀 있는 유골의 지역별 시대 구분, 복원의 방법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까와 같은 패턴대로 다시 문 하나를 지나자 유골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빼곡히 유골들이 쌓여 있는 모습에 소름이 끼쳐 뒷걸음을 칩니다. 그냥 바닥에 흩뿌려져 있거나 뼈 무더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했는 데, 뼈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두꺼운 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괴기함 그 자체입니다. 통로 좌우로 뼈로 이루어진 벽들이 카타콤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데 그 소름 끼치는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의 뼈도 해골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그게 온 사방에 빼곡하게 가득 차있다는 사실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습니다. 가지런히 정리된 유골들에서 죽은 사람으로 장난을 쳤다는 악의까지 느껴집니다. 도대체 이 뼈들이 다 시체라면 여기엔 얼마나 많은 죽은 사람들이 있는 건지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뼈 무더기 곳곳엔 해골로 만든 하트나 십자가 같은 게 보이는데 좀 도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뼈 무더기 사이엔 십자가가 곳곳에 보이는데, 이 끔찍한 지하 미궁을 조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루이 16가 묻혀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프랑스혁명 당시 기요틴에 희생된 뼈 무덤은 인상적입니다. 카타콤 코스 끄트머리엔 뼈로 만든 기묘한 항아리 모양의 기둥이 있는데, 과거엔 여기서 파티를 벌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가 않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프랑스 사람들에게 카타콤의 존재는 평범한 것이었을 까요?

갑자기 나타난 뼈무더귀 통로
유골로 만든 예술품들을, 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요?
드디어 탈출의 빛줄기가...
출구를 넘으니 이상한 기념품점이 나옵니다. 해괴해......

카타콤을 나오고 나서다 어지럼증이 가시질 않아 비틀거리며 거리를 걷습니다. 기다리는 시간까지 무려 세 시간이나 카타콤에 있었던 겁니다. 뭐라도 먹어야겠다며 길을 걷다 보니 KWON이라는 익숙한 스펠링이 보입니다. BIBIMBAP 메뉴를 홍보하는 간판이 서 있는데, 모양새를 보니 분명 한식집인 모양입니다. 창밖으로 보니 사장님도 종업원도 전부 한국 사람인데 한국 손님이 하나도 보이질 않습니다. 굶주린 저는 자리에 앉자마자 돼지불백을 주문합니다. 테이블에 있는 불판에 즉석으로 고기를 굽고, 반찬 다섯 개와 함께 공깃밥을 주는데 완전히 한국에서 먹던 그 맛입니다. 보통 한국에서 식당에 가면 반찬은 거의 손도 되지 않는데 이렇게 반찬이 곁들여지는 메뉴를 오랜만에 보다 보니 정말 싹싹 긁어먹습니다. 한 상에 17 유로나 되는 가격이지만, 파리에서 제대로 식사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그렇게 비싼 가격도 아닙니다. 와인과 함께 저녁 데이트를 즐기는 손님들로 가게가 가득한 걸 보니 현지에서도 잘 나가는 집인가 봅니다. 여하튼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저녁식사입니다.

현지인(?)이 많은 권식당. 예약이 많아서 겨우 남은 한 자리에서 운 좋게 식사를 하게 됩니다
이게 얼마 만에 먹는 불고기인지 모릅니다

저녁을 먹고 나니 시계가 오후 8시를 가리킵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질 텐데 이렇게 된 거 야경을 보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처에 몽파르나스 타워라는 초고층 빌딩이 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 테라스에 올라가면 파리 전경을 볼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파리의 모습은, 처음 왔을 때 느꼈던 잘 설계된 도시 그 자체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도로를 따라 직사각형 블록이 정확하게 나누어져 있고, 직사각형 블록들은 대각선으로 내부에 길이 나누어져 있는 게 선명하게 보입니다. 덕분에 도시는 삼각형 타일로 빽빽하게 도배된 느낌입니다. 

몽파르나스 타워에 도착!
줄을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려봅니다
기하학적으로 잘 설계되고 정돈된 도시

도시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테라스에 앉아 천천히 해가 지는 시간을 기다립니다. 특히 에펠탑이 보이는 방향은 인기가 많아서 사람들이 유리벽에 다 붙어 있는데, 유리벽 사이에 빈 틈으로 깨끗하게 도시의 풍경을 찍을 수 있어서 그 공간을 차지하려고 경쟁이 치열합니다. 저도 경쟁 끝에 자리를 얻어내지만, 해가 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9시, 9시 10분, 9시 20분, 9시 30분... 이제 해는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노을은 남아있고 좀처럼 어두워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어둠이 깔리기 만을 바라는 것도 오랜만입니다. 아직 노을빛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에펠탑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점점 어두워지면서 주변에 불빛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하고 에펠탑의 노란빛은 더 선명해집니다. 10시 정각이 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정각과 함께 에펠탑이 화려하게 반짝거리기 시작합니다. 에펠탑 꼭대기의 등대가 간간히 돌아가는 것도 보입니다. 어둠 속에서 거무칙칙한 건물 블록들 사이로 도로를 따라 불타오르는 도시의 풍경은 들끓는 용암을 떠오르게 합니다. 오랜 시간 하늘을 바라보며 풍경을 눈과 카메라에 담아 가는 파리의 하루입니다.

슬슬 지기 시작하는 해와 야경을 기다리는 테라스의 풍경
노을이 지기 시작하고
에펠탑은 붉게 타오릅니다
하나 둘 불이 들어오고
도시는 어둠과 붉은빛에 잠깁니다
에펠탑의 등대가 빙글빙글 돌고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파리
저도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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