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나는 나의 일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었다. 열심히 공부하여 원하는 학과에 들어갔고, 몇 번의 낙방과 매달림 끝에 얻은 귀한 나의 첫 번째 직업이자 사회생활이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첫 한 해 두 해는 적응하는데 시간을 보내느라 정신없이 지나갔다. 첫 직장에 들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올 수 있는 경험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내가 그토록 갖길 원했던 그 일이, 내가 그토록 속하고 경험하고 싶었던 그 직업의 현장이, 내가 미리 상상하고 예측했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현실은 내가 기대한 것보다 멋지지 않았고 훨씬 더 복잡하고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잡일(?)들이 많았으며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몹시 힘이 들었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따질 여유도 없었던 정신없는 적응기를 보낸 후에는 여러 가지 잡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일단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고 지친 상태. 나의 적성과 맞지 않는다는 느낌. 내가 원하던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 앞으로 계속 이 일을 잘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 다른 사람들보다 이 일을 잘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 소극적으로 변해가며 움츠러드는 태도.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건 아닌지 무능력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감. 이 일에 자신이 없다는 생각으로 인한 두려움. 나는 자격이 없다는, 나는 못났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그때의 나는 이런 내적 갈등과 혼란에 스스로 휩싸여 엉망진창의 나날들을 보냈다. 일로부터 좀 거리를 두고 휴식을 취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하고 공부를 하여 능력을 충전하면서(공부를 요구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는 동안에는 공부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정말 부족했다) 다시 일에 대한 애정을 찾고 싶었으나, 그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에게는 적절한 휴직 사유가 없었으므로.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젊디 젊은 젊은이가 그토록 원하던 직업을 얻고서 이런 한심한 생각들로 마음을 채우고 있다니. 스스로 한심함의 극치를 경험했다. 이런 마음 상태로 매일 출근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에게 양심이 있다면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일이 아니면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도 할 여력이 없었고, 새로운 도전을 할 용기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세상 우울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무거운 존재감을 드러내던 시절이었다. 참으로 고되었던 자학의 시절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하루하루 버티는 생활을 이어갔다.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애써 무시하고 보지 않으려 하면서. 내 생각들을 애써 부정하면서.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나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면서.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꾸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 믿으면서. 일단 버텨보기로 한 것이다. 당장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퇴근 후 모든 시간을 헬스장에서 보내면서 집착적으로 운동에 몰두해보기도 하고, 철학과 문학 책들을 탐독하면서 무너지려 하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아 올리려 발버둥 쳤다. 발레를 배우고 수영도 배우고 피아노도 배우고 기타도 배우고 프랑스어와 중국어 강의도 듣고. 그냥 이것저것 일이 아닌 것에 무작정 달려들었다. 소개팅도 정말 많이 했고, 다양한 친구들과 교류하려고 노력했다. 일이 아닌 곳에서 어떤 탈출구를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루하루 정말 바빴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내면에서 풀리지 않은 나와 일과의 관계가 나를 바쁘게 괴롭혔다. 그럼에도 내가 신뢰하는 주변 사람들의 강한 만류로(감사하게도, 단 한 명도 나에게 일을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당시 친구의 남자친구까지도 나의 퇴사를 말렸다.) 버티고 버틸 수 있었고, 내가 스스로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주자는 보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보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함을 가져보자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면서 내가 문제이니 내가 바뀌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각으로 뭔가가 변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현실에 순응하려는 노력을 하며 지내던 중 결혼을 하게 되었고 임신출산육아의 과정을 거치며 그토록 원하던 휴직을 하게 되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한동안 쉴 수 있다는 마음에 한시름 덜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직 기간 동안에는 일과 관련된 생각을 하나도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일과 거리를 두고 일과 멀어지고 싶었다. 새로운 분야를 탐색하고도 싶었다. 그래서 육아에 충실하되, 독서와 글쓰기에 집중해보고, 문예창작과 상담심리를 전공으로 사이버대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나의 직업 전문성을 키우기 위한 공부와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약간의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일단 현재에 집중하자고, 복직하면 이렇게 해보고 싶은 일들을 해볼 엄두조차 낼 수 없을 테니까 지금을 즐겨보자고 합리화를 하곤 했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 언제나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은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육아만 몇 년 하다 보니, 다양한 워킹맘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들을 읽어보니, ‘나도 나의 일이 있는데... 나도 나의 일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오면서 슬슬 일을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만난 책 임종령 작가의 <베테랑의 공부>. 동시통역사로서 공부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는데, 그녀의 일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좀처럼 다시 시작할 수가 없었던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된 것이다. 그녀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하루는 밀려오는 단어와 표현들을 상기하면서 시작된다. 5시는 고요한 시간이다. 아직 남편은 잠들어 있고 태평양 너머에 있는 두 딸도 각자의 일과를 치르느라 분주할 시간이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어떤 잡음도 없는 나만의 새벽 시간. 조용히 영자신문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오늘의 뉴스 헤드라인을 훑고, 새로운 단어와 표현을 머릿속에 넣고, 같은 문장을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지 작문을 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일과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새벽이 흘러간다.”
“내가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뿌리는 '공부'에 있다. 처음 통역사로 일하기 시작한 3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는 매일 변함없이 새벽에 기상해 한국 뉴스를 정독하고 영어 뉴스를 확인한다. 운전을 하면서 영어 오디오북을 듣거나 그날 동시통역에 필요한 중요한 문장을 AI의 목소리로 들으며 따라 말한다. 일과가 마무리되는 밤이면 다음날 있을 번역 자료를 검토하며 하루를 마친다. 이렇게 나의 하루는 24시간이 거의 모두 공부로 이루어져 있다. 통역에 필요한 영어 공부, 한국어 공부는 물론이고, 통역 관련 분야의 배경지식, 빠르게 바뀌는 시사 뉴스, 경제, 학술, 과학 정보에 이르기까지 그 폭과 깊이는 다양하다. 이렇게 30년을 공부로 일상을 빼곡하게 채우다 보니, 일을 위해 시작한 공부는 어느새 삶을 위한 공부로 이어지고 있음을 새삼 경험한다.”
“나는 일을 하는 자세가 결코 일에만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겠다는 책임감, 일과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 힘든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끈기, 최선을 다했으나 초라한 결과가 나왔을 때에도 감사히 받아들이는 겸허함까지, 일하면서 경험한 희로애락은 고스란히 내가 삶을 살아가는 태도로 연결되어 나를 성장하고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일에 매진했을 때 일은 곧 인격이 됨을 매 순간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일에 대한 그녀의 생각들을 읽어나가면서 참으로 많이 부끄러운 순간들이 많았다. 불평불만만 하면서 허송세월 시간을 보냈던 나의 과거가 너무나도 창피하게 느껴졌다. 어떤 일을 하느냐에 문제가 아니었다. 그 어떤 일을 하든 나에게 주어진 일을 사랑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해 나의 열정과 삶을 쏟아부을 수 있는가, 그것이 핵심이었다. 나의 문제는 역시 나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로써 나에게 반성과 깨우침을 주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일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가 너무나 멋져 보이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배우고 싶었다. 닮고 싶었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하루 24시간을 공부로 채우며 살고 있다는 그녀. 일과 삶이 하나가 되는 진정한 자아실현의 인생을 매일 성취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녀. 가족을 챙기는 일에도 일을 대할 때처럼 성실하게 열심히 임하는 그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용기와 희망이 내 안에도 피어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아침 영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어떤 핑계와 변명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나가자고 다짐하면서.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었던가. 요즘에는 영어를 공부하는 그 짧은 시간이 너무 즐겁고 행복하고 소중하다. 매일 꾸준히 책장을 넘기면서 쌓여나가는 페이지수를 보는 일도 그저 뿌듯할 뿐이다. 영어교육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그 죄책감과 불안감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복직 후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해방이다.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면서 잘 살고 있다는 안정감과 드디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안도감에 나의 삶에도 편안함과 평온함이 찾아왔다. 나의 일과의 바람직하고 애정 어린 관계를 다시 형성해나가는 중인 것이다. 우리는 서로 화해하고 평화로운 관계로의 회복 중에 있다. 나는 치유되고 있는 것이다.
일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 형성에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신뢰 깊고 애정 넘치는 일과의 관계 형성이 중요한 이유이다. 워라밸의 시대라고 하지만, 일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일이 아무리 힘들다고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없다면 무엇으로 삶이라는 시간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채워나갈 것이란 말인가. 일을 한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핵심을 이루는 정말 필수적이고 가치로운 활동임을 깨닫는다. 나의 일이 있다는 것은 정말 소중하고 귀중한 자산이 나에게 있다는 것임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나는 나의 일에 대해 얼마나 애정을 가질 수 있고 얼마나 열정을 쏟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자신의 일에 몰입하고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갖는 것. 이것 또한 능력이며, 훈련하고 연습해야 할 삶의 기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이라는 것의 의미가 내 삶 속에서 좀 더 귀중하게 다뤄지길 바라는 바이다. 궁극적으로는 일이 곧 삶이 되고 삶이 곧 일이 되는, 일과 삶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 일을 통해 진정한 나로서의 삶에 도달하는, 일을 통해 진정한 행복감과 만족감에 이를 수 있는, 그런 경지에 다다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지 상관없이 나의 일은 나에게 정말 소중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일은 소중하다. 일은 정말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