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읽고 쓰는 삶 Dec 13. 2024

끝과 시작 사이에서

삶은 계속된다

나는 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에 재학 중인데, 어제 사이버대학 한 학기 수강을 시험까지 모두 마무리지었다. 이번 학기 다섯 과목을 수강했는데, 20개월 딸아이 육아와 임신 기간과 겹치다 보니 다소 벅차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얼른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음 달 출산 예정이라 준비도 해야 하는데... 강의를 핑계로 모든 준비를 미루고 있었다. 최근 시험 기간에는 집안일에도 의도적으로 게으름을 피웠다. 학창 시절 시험 기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학생 모드로 지냈다. ‘사이버대학이 뭐라고’라는 말로 알게 모르게 받고 있던 스트레스가 표출되었고, ‘사이버대학 강의만 끝나면’이라는 말이 순간의 스트레스를 모면하는 마법의 주문이 되곤 했었다. 이렇게 한동안 내 일상의 중심을 이루던 일이 어제 드디어 끝이 났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왠지 아리송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모든 게 예상대로 진행되었고 마무리 됐으며 이제 후련한 마음으로 다음 계획인 출산 준비 모드에 돌입하기만 하면 되는데. 모든 상황이 내 생각대로 척척 퍼즐처럼 완벽히 들어맞아 가고 있는데. 다음 단계로 폴짝 뛰어 가뿐하게 넘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이런 기분은 왜인거지. 몸이 생각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바로 다음 행동을 취할 수가 없다. 생각의 정리가 필요한 걸까? 마음의 청소가 필요한 걸까?


요즘따라 어쩐 일인지 아침 기상도 수월하고 영어 공부도 잘 되며 책 읽는 것도 너무 즐겁기만 하다. 특히 글을 쓰고 싶다는 반가운 열망이 점점 커져서 ‘쓰는 습관’ 장착을 위해 나름대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며 재미있고 알차게 살고 있다. 강의를 듣고 과제도 하며 학창 시절처럼 학업에 열중하는 학생 모드로 지냈던 몇 개월이 살림과 육아의 짐을 지고 있는 현재의 나에게는 다소 사치스러운 고급문화 향유의 시간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때로는 강의 들으랴 과제하랴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건 단순히 스트레스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너무나도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들이 이제 당분간 내 일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쉬움을 느낀다. 생명을 돌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일임을 나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하면서 출산 준비를 시작해 보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본다.


이제 오늘부터 출산 준비 시작이다! 스스로에게 선언하면서 나 자신에게 묻는다. ‘오늘은 뭐 하지? 뭐부터 시작해야 하지?’ 그리고 내가 답한다. ‘구입할 물건들은 주문하면 금방 오니까 나중에 해도 되고, 신생아 육아와 수유에 필요한 물건들은 잘 정리된 채로 붙박이장 속에 보관되어 있으니까 꺼내기만 하면 되고, 출산 가방 싸는 것도 금방 되는 일이니까 나중에 하면 되고, 산후조리용 음식 재료들도 아직 출산까지 그래도 시간이 조금은 남았으니까 나중에 사도 될 것 같고, 집안 청소와 정리는 뭐 평소처럼 대충 하면 될 것 같고... 체력을 위해 운동을 해야 할까? 신생아 키우는 방법 벌써 다 잊어버렸는데 책을 다시 들춰보며 공부를 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 필요한 건 마음의 준비? 출산하면 당분간 하기 힘든 일들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글쓰기? 독서?’ 이렇게 내 몸과 마음은 아직 읽고 쓰는 삶 모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벗어날 생각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솔직히 벗어나고 싶지 않다. 벗어나면 안 된다고 느낀다. 이번주 내로는 이런 마음을 정리하고 또 다른 시작과 다음 단계로 과감히 뛰어들어야 할 것임을 알리는 경고메시지를 나 자신에게 띄워보지만... 또 다른 잡념이 떠오른다.


출산 준비와 출산과 신생아 육아, 그리고 ‘읽고 쓰는 일상’. 이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희망과 미련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경험상 그럴 수 없을 거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념해 보지만 비록 헛된 희망일지라도 이런 희망이 지금은 나에게 큰 위안을 주고 있다. 그 둘 다 나에게는 결코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절대가치를 지닌 일들이기에. 그래도 생명의 고귀함을 이길 것은 없지. 암, 그렇고 말고.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앞으로 몇 개월간 엄마로서의 의무를 순순하게 따를 것이다. 오직 엄마로서의 삶에 충실할 것이고, 그 안에서 크나큰 만족감과 숭고한 사랑을 경험할 것이다. 출산과 육아로 몸은 다소 고되고 피곤할지언정 정신만큼은 풍요로움과 감사함으로 무한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당분간 읽고 쓰는 일상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당분간이다. 당분간만이다. 가능할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틈이 난다면 나는 언제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을 것이다. 마음 한편엔 언제나 읽고 쓰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달래 본다. 어떤 상황에서도 읽고 쓰는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나 자신에게서 받아낼 때까지 나를 들볶고 또 들볶는 중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 이 시간도 이제 곧 사치가 될 것이다. 출산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며칠간 이런 잡념들이 내 안에서 뒤죽박죽 뒤엉켜 돌아다닐 것을 안다.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오래오래 이런 상태에 머무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혼란과 무질서의 상태를 어떻게 해서든 강제로 끝내버리겠다는 헛된 각오와 과한 욕심을 버릴 것. 하루아침에 다음 단계로 풍덩 단번에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과 믿음의 오류를 바로 잡을 것. 모든 일을 계획했던 대로 퍼즐 맞추듯이 촥촥 단계적으로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한 착각에서 벗어날 것. 앞으로도 내 인생에 펼쳐질 모든 끝과 시작 사이마다 이런 진공의 순간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생각을 청소하고 마음을 정리하는 일은 평생 끝이 없는 일이다. 집안일처럼 매일 틈틈이 자주 해주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지금 나는 그 ‘틈틈이’라는 시간 속에 잠시 머무르며 생각 청소와 마음 정리를 시도하고 있고, 이 틈틈이 시간도 참 달콤하게 느껴진다. 곧 책상에서 일어나 이 시간을 벗어나면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향할 것이고 그곳은 분명 출산 준비라는 다음 단계의 출발선이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을 음미한다.


사실 끝과 시작이라는 것은 내가 임의적으로 정한 환상의 지점들이다. 원래 끝은 없고 시작도 없으며, 오직 ‘계속됨’만 있다. 끝과 새로운 시작 사이 잠시 정지된 진공 상태에 있다고 느끼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은 계속 흘러가고 있으며 모든 것이 계속되고 있다. 생각 청소, 마음 정리, 집안일, 공부, 독서, 글쓰기, 육아, 출산 준비 등등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내 일상에 침투되어 나와 함께 흐르고 있다. 모든 것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모든 것이 과정안에 있다. 삶은 과정이다. 어쩌면 끝을 깔끔하게 매듭짓고 시작을 깨끗하게 맞이하려고 하는 것은 생각과 마음이 빚어내는 결벽증적 현상일지 모른다. 끝과 시작이라는 환상의 이정표는 나에게 무질서와 혼돈의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은 원래 동시에 뒤죽박죽 존재한다. 질서는 내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다. 무질서와 혼란은 계속되고 있고 계속될 것이다. 변화 또한 서서히 자연스럽게 점차적으로 계속되며 내 삶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삶은 계속된다. 모든 것이 계속될 것이다.


끝과 시작 사이에서 마음을 다잡으려는 시도를 과감하게 포기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움직인다. 움직임을 계속한다. 그냥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삶은 계속된다. 나의 일상은 이렇게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나는 삶의 과정 중에 있다. 출산 준비 중에도, 출산 후에도, 육아를 하면서도 나의 읽고 쓰는 삶은 계속될 것이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평생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그 무엇도 걱정하지 말 일이다. 아쉬워하지 말 일이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저 계속되는 ‘지금’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겨보기를. 언제나 계속되는 ‘과정’을 느끼고 맛보며 즐겨 보기를.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속에 담겨 출렁이고 있다. 그 출렁임의 과정은 언제나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결론은 하나다. 바로 ‘지금 이 순간’만이 내가 진정으로 속해 있을 곳이라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