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집안일이 고되게 느껴질 때면 집안일에는 영 취미도 소질도 없는 남편이 괜히 눈엣가시처럼 느껴지곤 한다. 어떨 때는 남편을 챙기는 일이 아이를 돌보는 일보다 더 힘에 부칠 때도 있다. 시어머니께서 아주 이상적인 어머니로서 돌봄과 챙김의 역할을 너무 잘해주셨고 그러한 깊은 사랑 아래에서 자라서 그런지 우리 남편은 요즘 사람들에 비해 다소 독립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옆에서 챙겨줘야 하는 것이 좀 많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결혼 전에는 여자로서 챙김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결혼 후에 눈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결혼한 사람은 나를 챙겨줄 사람이 아니라 나의 챙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나는 비교적 빠르게 깨달았다. 나는 그의 제2의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게 싫지는 않았고, 여자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어머니 같은 존재, 어머니가 되고 싶은 모성애의 욕망이 강했기 때문에. 오히려 미래에 어머니가 될 내가 지녀야 할 덕목과 기술들을 연습할 기회라고 여겼다. 나 스스로 집안살림을 내가 전담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판단에 이르기도 했다. 어차피 혼자 살아도 해야 하는 것이 집안일이고 익숙해져야 하고 결국 단련되어야 하는 것이 살림이라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억울한 마음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살림꾼’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장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건 결코 자기합리화가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생각들을 해나가면서 나는 어릴 적의 나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사랑의 또 다른 형태와 의미를 배우고 깨달아가는 것 같이 느껴져 뿌듯했다.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 진짜 사랑임을 경험으로 직접 알아가 보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의존성을 버리고 독립적이고 강한 여성이 되기로 결심했고, 멋진 아내가 그리고 훌륭한 어머니가 되어보자고 용감하게 선언을 했다. 완벽한 주부이자 살림꾼이 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태세를 갖췄다.
늘 이렇게 거창하게 의미부여를 하고 난 뒤에야 움직일 수 있는 나란 사람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의미와 가치를 결혼생활과 살림살이에 부여해 놓고서 나는 혼자 끙끙대며 집안살림을 이끌어가려 했다. 사실 ‘남편보다는 그래도 내가 낫겠지’라는 근거 없는 생각과 자신만만한 태도에 비해 살림을 처음 해보는 나는 말 그대로 살림에 있어서 초보 중에 초보였으므로 무척 서툴렀다. 집안살림과 가정생활의 달인이신 우리 시어머니를 롤모델로 삼아 아주 완벽하게 가정과 살림을 가꾸어나가 보려고 무진장 노력하고 실험해 보는 나날들이 지나갔다. 물론 마음만 엄청 앞서고 정작 몸은 잘 따라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적어도 마음만큼은 애쓰고 또 애써 보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열정과 사명으로 똘똘 뭉쳤지만 실수가 일상인 귀여운 초보 주부였다. 요리라고는 해본 적 없는 내가 삼 시 세끼 정갈한 한식상 차리기에 무작정 도전했다. 물론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는 예상된 결과였고. 설거지와 빨래, 청소 등에 대해 하나씩 인터넷 검색을 해가며 공부를 했다. 살림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던 때라 노트와 펜을 들고 공부를 하는 수밖에. 머릿속에 정보를 입력하고 의심과 비판이라고는 전혀 없이 문자 그대로의 설명을 실행에 옮겨보며 수많은 실험을 해나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아지는 듯 나아지지 않는 듯 천천히 느리게 그렇게 나의 살림력은 서서히 올라갔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덧 20개월 딸아이, 다음 달 태어날 둘째와 함께 네 식구를 이룬 어엿한 6년 차 주부가 되었다. 이렇게 글로 적으며 되돌아보니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그 시간들. 주부로서 나름 아주 많은 성장을 이룬 것 같아 새삼스레 보람이 느껴지고 뿌듯하다.
주부로서 뿐만 아니라 내 남편의 아내로서도 나는 아주 많은 발전을 이뤘다. 남편사용설명서를 작성할 수 있을 정도로 남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남편이 원하고 또 필요로 하는 것들을 먼저 알고 챙겨줄 수 있어서 기쁘다. 아직도 시어머니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저 매일 노력하면서 나아가는 엄마이자 아내이다. 돌봄과 챙김은 기쁨이자 축복이라는 사실을 매일 알아간다. 엄마와 아내로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신성하고 고귀한 의무이자 특권임을 자각하면 자부심과 책임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집안일이 가끔 귀찮고 버겁게 느껴질 때면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신이 나에게 주신 이 모든 경이롭고 기적적인 선물들에 대해 깊이 묵상에 잠겨본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제 20개월이 된 아이는 요즘 자율성을 획득해 나가며 계단을 오를 때에도 엄마 손을 뿌리치려 하는데, 우리 집 큰아드님(남편)은 아직도(어쩌면 갈수록 점점 더) 적극적으로 엄마(나)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등원한 후에 여유롭게 누리는 자유의 시간도 잠시, 휴직 중인 배고픈 남편이 등장한다. 허기지고 굶주린 나의 어여쁜 남편님이 나의 모성애를 자극한다. 아이가 어린이집에만 가면 한결 몸이 편해질 줄 알았건만, 주부의 부지런함은 24시간 작동 모드에 있어야 하는가 보다. 오늘따라 글이 잘 써지는 것 같은 느낌, 이 느낌 지금 잃고 싶지 않은데. 이 흐름 끊고 싶지 않은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몸은 어느새 주방으로 향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그대를 위해서 요리를 했다. 마늘과 고춧가루로 기름을 내고 신선한 돼지고기를 다양한 야채들과 볶아 간장과 올리고당으로 맛을 낸 매콤달콤 제육볶음. 채 썬 고구마를 달걀과 부침가루를 섞은 반죽과 함께 팬에 구운 고구마전. 참기름과 깨로 풍미를 더한 간장양념장. 뜨끈한 된장국. 여기에 시어머니의 정성이 듬뿍 담긴 갓 담근 배추김치와 알타리무김치를 더하면. 짜자잔. 오늘의 점심 상차림 완성. 많이 배고팠는지 허겁지겁 정말로 맛있게도 먹는 그대의 모습에 기쁨과 보람이 치솟기 시작한다. ‘가족들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아내와 엄마들은 이 맛에 요리를 하나보다,라고 생각해본다. 오늘은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대 덕분에 나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구나.’ 과연 나 혼자 살았다면 이렇게 내가 요리를 할 일도, 맛있게 요리를 해야겠다는 생각과 노력도, 내가 한 요리를 내가 먹을 기회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속에 행복감이 밀려왔다. 나의 존재가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가족을 위해 주었던 사랑이 결국 나에게로 돌아왔구나. 가족을 아끼고 보살피는 일이 곧 나 자신을 아끼고 보살피는 일이었구나. 가족을 사랑하면서 나를 사랑하는 법도 배워나간다.
오늘 나는 그대를 위해서 요리를 하고, 그대 덕분에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여보, 나의 그대, 나의 당신,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