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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 Feb 12. 2022

그날의 횡성

무기력을 공유하면 힘이 된다

약 2년 전

같은 회사를 다니다가 그곳에 지쳐 이직한 사람, 퇴사한 사람, 팀을 옮긴 사람, 참고 머무르는 사람,

이 4명이 모여 '식구'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식구가 되었는지 사실 정확히 기억은  난다. 밥을 먹으면서 서로의 힘듦을 공유하고 위로하고 그러면서  모임의 이름이 붙여졌던  같기도 하고.

'식구'라는 이름 아래 생기는 관계성 덕에 자주 마주 앉아 밥을 먹지는 못하더라도 꾸준히 서로의 끼니를 걱정하고 안부를 물어왔다.


그러다가 네 명 모두 멘탈이 탈탈 털릴 정도로 지쳐있던 시기에 저희, 떠나요! 해서 덜컥 에어비앤비에서 예약해버린 한 별장.

위치는 딱히 관광지라 할 것도 없는 횡성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횡성 가서 뭐해요? 거기에 뭐 있어요? 하고 묻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기차와 숙소 외에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로 여행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멤버 한 명이 새벽까지 일을 한 탓에 기차를 놓쳐 3시간 후에나 합류했던 웃픈 일도 벌어졌다.


나를 포함해 제시간에 도착한  사람은 횡성역 앞에서 택시를 잡고 "아저씨, 저희 막국수 먹으려고 하는데 맛있는  데려다주세요."라는 즉흥적인  마디로  행선지를 정했다.

우연히 알게 된 밥집에서 밥을 먹고 눈앞에 보이는 북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다시 눈앞에 보이는 하나로마트에 들어가 소고기와 술 몇 병을 샀다.


즉흥만 가득한 채로 횡성을 한 바퀴 돌고 나서 해가 지기 전 별장에 도착했다. 불과 열 걸음 앞에 호수가 있었다. 별장 안에는 요즘 어딜 가나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 대신 캔모아 감성 가득한 노래가 담긴 CD와 LP판이 가득 있었고 핸드 드립 커피 기계도 주방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노래를 바꾸려면 CD나 LP를 갈아 끼기 위해 발과 손가락을 부지런히 놀려야 했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도 팔을 돌려가며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모두 그 느리고 수동적인 공간에 동화되어 아무도 재촉하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이야기를 하고 듣고 싶은 사람은 들었다. 무언갈 하기 위해 애써 찾거나 정적을 메꾸기 위해 실없는 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편안한 상태로 있었다.


밤에는 각자 누워있던  상태로 이불을 하나씩 뒤집어쓰고, 슬리퍼를 끌고 나가 호숫가 벤치에 앉았다. 대리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이 많은 별들을 세며 한참을  때렸다. 다들 별말없이 반짝거리는 눈에 반짝거리는 별들을 담을 뿐이었다.


 날의  하얀  떼와, LP 테이블에서 흐르던 재즈 음악과, 천천히 내린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며 보던 차가운 겨울의 호수는  삶에  여운으로 자리 잡았다.


예전에 한 여행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같이 무기력해줘서 고마워."

무기력한 사람들을 무조건 끌어내 유기력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저 함께 같은 상태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에게 횡성은 그런 곳으로 남았다.


시간이 흘러 누군가는 팀원에서 팀장이 되었고, 누군가는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샀고, 누군가는 이직을 했다. 이제 그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식구'라는 그룹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이 횡성 별장을 잊지 못해 다른 친구들과도 다녀왔는데, 알고 보니 나 말고도 다들 이미 그 횡성을 그리워하며 한 번씩 더 다녀왔더란다. 각자의 가족과, 친구와, 지인과.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영역에서 하나를 바라보고 같은 것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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