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심시티15회 - ‘성평등, 롸잇나우.’ 1부
‘심즈 인벤토리’는 도시 디자인 팟캐스트 ‘라디오심시티(Radio S.I.M. City)’의 ‘심즈토크’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번에는 심딴지가 생각하는 라디오 심시티의 ‘성평등’에 대한 고민이 무엇인지 『라디오심시티 15회 - ‘성평등, 롸잇나우.’ 1부』에서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상상하고 실천할 수 있을지 정리하였습니다. 심딴지의 ‘명예남성’이거나 ‘여자’이거나’를 소개합니다.
여자라면 본디 온화하고, 순종적이고, 가정적이어야지.
여자라면 ‘자고로’ 어떠해야한다는 이야기. 지극히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말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나는 여성과 여자를 분리시켜 이해해왔다. 인간을 생물학적 기능과 신체적 조건을 기준으로 나눈 것이 ‘여성(female)’과 ‘남성(male)’이며, 사회에서의 성(gender) 역할을 기준으로 나눈 것이 ‘여자(women)’과 ‘남자(men)’인 것이라고. 남성중심으로 구조화된 거의 모든 사회에서 그렇겠지만 특히, 한국사회에서 ‘여자’는 여성을 판단하는 기준이자, 사회에서 부여하는 성 역할을 극대화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여자’는 ‘여성성’ 혹은 ‘여성미’가 풍부하게 발현될 때 비로소 남성이 그린 완벽한 ‘여자’에 도달한다. 여성의 일상에서 이러한 ‘틀’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누구나 한번쯤은 SNS를 비롯한 여러 온라인 매체에서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화장법,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 옷, 남자가 호감을 느끼는 여자 행동 등의 콘텐츠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콘텐츠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여성의 모습은 대개 수동적이며, 조신하며, 나약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내 남자에게만큼은 ‘틈’을 보이며, 애교가 넘치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은밀한 섹시함까지 겸비해야함을 동시에 강조한다. 남자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완벽한 여자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는 콘텐츠만 문제적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라고 만들어진 콘텐츠에서도 ‘여자들은 나를 지켜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라는 커다란 전제가 깔려있다. 이 외에도, 여자는 나약한 존재, 남자가 지켜줘야 할 존재임을 강조하는 콘텐츠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때, 남성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은 ‘여자’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주변에서 (특히, 남성들은) 끊임없이 ‘여자’가 되지 못하면 어떤 존재로 전락하는지 상기시킨다. 나의 경험을 비춰보자면, 20대 중반이 되면서 듣게 된 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꺽인’나이가 되는 것이다. 여자는 25살까지는 꽃이 활짝 피듯 예쁘게 피어나지만, 26살 이후로는 급격히 져버린다는 무섭고도 놀라운 이야기. 설상가상으로 여자 나이 서른이 넘어서 아이를 낳게 되면, 유전적인 문제가 몇 퍼센트나 올라간다는 과학 정보를 들이대며 위협한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 여부를 떠나서, 나이로 여성을 나누는 기준 자체가 지극히 남성의 시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나이를 들먹인다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 재밌는 것은 ‘나이 듦’이 여성에게는 치명적인 일인 반면에, 남성에게는 마치 와인이 숙성되는 것처럼 긍정적인 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남성은 나이가 들어도 소위 ‘영포티’가 되어 경제력과 더욱 숙성된(?) 매력을 바탕으로 어린 여성을 만날 수 있다는 판타지와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여성에게 늙음이 쌓이는 동안, 남성에게는 연륜이 쌓인다는 신화. 하지만 이는 남성들의 시각으로 쓰인 불평등하고 위험한 신화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한대로, 남성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은 끊임없는 지적과 편견으로 얼룩진 잣대를 마주한다. 남성이 주장하는 ‘여자’가 되기 위한 과정은 듣고만 있어도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 피폐해진 정신 상태는 이윽고 남성의 평가 기준에 맞추어 여성이 자기 자신을 검열하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 때,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생존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남성들이 주장하는 ‘완벽한 여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선택하면, 최소한 ‘여자라면’이나 ‘여자가 감히’라는 말을 비교적 덜 듣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여자라면’이나 ‘여자가 감히’라는 표현이 ‘여자니까’ 또는 ‘여자라서’라는 말로 환원된다는 점이다. 결국 남성에게 ‘여자’라는 단어는 ‘여성’을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이해하기위해 사용해야하는 필수적인 어휘인 것이다.
따라서 내가 선택했던 것은 두 번째 전략, 남성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임과 동시에 ‘여자’임을 거부하고 ‘남자’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남성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행동하는 것, 남성들과 친구가 되는 것. 이른바 ‘명예남성’이 되고자 했다. 물론 더 정확한 의미에서 ‘명예남성’은 능력을 중심으로 자신의 일터에서 유리천장을 뚫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 보일 수 있는 남성적인 언어나 태도들을 빗대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남성화하였을 때, 나의 능력과 상관없이, 기존에 들어야만 했던 차별적인 언어에 비교적 덜 노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성들과 나누는 강도 높은 음담패설, 유약한 상대를 향해 던지는 농담을 빙자한 비하발언, ‘보통’ 여자와 나를 분리하는 것. 나는 남성 사이에서 잘 섞여있는 외형은 ‘여성’이지만 ‘여자’가 아닌 존재가 되고자 했다. 그 때 나는 ‘다른 여자들이랑 다르다’, ‘넌 ‘여자’는 아니지’, ‘의외로 여성적이야.’ 같은 말을 들을 때 좋았다. 돌이켜보면, 그 때의 나는 더 이상 ‘여자’의 기준에 평가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에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좋은 여자’로 평가되는 것에 만족했다.
‘여성’이 ‘여자’로 비춰지지 않기 위해 선택한 생존전략이라는 측면에서, ‘명예남성’이라는 용어가 남성들 사이에서 어떻게 인식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뿐 더러 실제로 효과적인 생존전략이라고 보기 어렵다. 나처럼 딱히 큰 권력이 없는 ‘명예남성’은 남성이 조심하지 않아도 될 대상으로 여기고 어울리기 편하다고 생각할 뿐, 결국 여성은 ‘여자’로서 존재해야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권력을 가진 ‘명예남성’은 ‘여자’임에도 “예외적”으로 능력이 ‘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 능력 또한 남성인 상사에게 ‘잘 보였을 것’으로 간주되는 일이 허다하다.
‘여자’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생물학적 기능과 신체적 조건만 남은 ‘여성’이 되고자 했던 나의 ‘명예남성’의 길은 남성기득권과 가부장제가 만연한 사회를 공고화 하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나는 스스로 남성적인 사고와 태도,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자 한다. 다른 누구의 기준으로 나를 검열하거나, 대응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앞으로 ‘여성’과 ‘여자’를 나누어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내가 나일 때 받는 차별과 편견에 대해서 목소리 낼 것이다. 나는 이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인격으로 존재하길 원한다.
‘명예남성’이라 명명되는 생존전략에서 볼 수 있듯, 여성이 이 사회에서 ‘나’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고민은 전체 사회 구조의 문제와 깊이 연결된다. 영화를 보아도, 여성이 남성중심 사회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강한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경우는 있다. 그런 영화들은 대부분 '스포츠'를 소재로 하며 여성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이는 부단히 노력해 달성해내는 성과, 즉 ‘능력’이 없으면 결국 그 자신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능력을 중심으로 인정되는 사회는 언뜻 평등한 것처럼 보이나, 능력 없는 평범한 개인들은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도 괜찮다는 전제가 숨겨져 있다.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이미 남성 중심으로 만들어진 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독하게 자신을 담금질해야한다. 따라서 진짜 문제는 ‘남성중심’으로 구조화 된 사회일 것인데, 이를 정확히 꼬집어내는 영화를 찾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영화 제작 환경' 또한 남성중심의 리그이기 때문일까?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여성’은 ‘이기적’인가. 왜 ‘나’로 산다는 것이 유독 여성에게만 더 가혹한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일상은 앞으로도 나아질 일이 없을까.
가혹한 일상을 조금 색다른 상상으로 채워볼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바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라는 책이다. 영문 원서는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프로젝트’라고 해서 2015년에 출간되었다. 원서에서는 ‘미래의 57가지 비전’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는데, 여성 정치적 관점, 인종문제, 성적취향, 계급 등 다양한 관점이 담겨있다. 이 책에 수록된 57명의 페미니스트들의 에세이, 이야기, 시, 시각예술, 인터뷰 등의 작품을 통해 페미니즘이 도래한 세상을 다각도로 접해볼 수 있다. 한국판은 57명의 미국 페미니스트 목소리에 한국에 살고 있는 7명의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더해 편집되어 2017년 2월에 출간되었다. 한국 사회의 문제까지 포함한 이 책은 근원적인 ‘성’문제가 전 지구적인 문제임을 보여준다.
작가들이 주목하는 문제는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건설에 필수적이며, 동시에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주제들이다. 성폭력, 외모평가, 가사노동, 법체계, 경제, 보육, 일상적인 공포 등의 문제가 어떻게 해소되고 새롭게 정의될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정의되어야하는지 보여준다. 이 중에서도 ‘명예남성’이 언급된 한국 작가의 글이 인상적이다. 최서윤 작가의 작품은 ‘명예남성’이라는 단어가 현재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지 사례를 보여주며, 남성기득권과 가부장제의 억압을 깨는 방법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남성 기득권과 가부장제에 잘 적응했던 ‘명예남성’들의 전향과 고백이라는 방법이었다.
실제 방송을 준비하기 위해 명예남성을 검색했을 때, 뉴스 기사보다는 개인 블로그에서 해당 단어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한 때 남성기득권과 가부장제 아래 ‘명예남성’이었던 사람의 고백. ‘명예남성’으로 살아왔던 자신이 결국 가부장제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했다는 내용의 개인 블로그. 바로 이런 흐름이 최서윤 작가가 말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솔루션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더 나은 내일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한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 시대의 ‘성’차별적 문제에 대한 솔루션을 담고 있다. 내일 내가 살고 싶은 곳을 그려보고 싶은 분, 내가 나로 존중받길 원하는 분, 남의 잣대에 지쳐버린 분,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머리말에 나온 추천사를 남겨본다.
“우리가 다 함께 야심만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욕심쟁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중략)...우리에게 오늘에 대한 관심과 내일에 대한 관심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떤 미래를 건설하려면 먼저 그걸 반드시 그려 봐야한다. 현실에 대한 전략을 세울 때도 반드시 우리가 지향하는 곳의 그림을 그리고,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희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더욱이 꿈을 꾼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바로 여기, 바로 지금의 반란 행위이다. 그저 더 나은, 더 자유로운 삶을 살 권리를 상상하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여자들은 이미 남들이 허락하는 인생을 살고 남들이 허락하는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의 도시를 함께 상상합니다. 도시 디자인 팟캐스트 라디오심시티(Radio S.I.M.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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