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을 그림
피천득의 글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한글로 그려내는 한 폭의 소묘화 같은 느낌을 지니고 있다.
일상을 그려내는 그의 간결한 문장엔 복잡한 어휘와 수많은 미사여구가 필요하지 않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무던하고 덤덤하게 그려내는 일상의 행위를 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의 글을 읽을 때면 영화 인터스텔라 속 목성의 장면을 보는 듯한 전율이 인다.
피천득의 수필 속 봄과 오월 이 두개의 글은 정말 큰 감동을 지니고 있다.
다음은 그 중 오월이라는 글을 인용해보려한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살이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사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중략)
신록을 바라다 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스물 한살에 오월을 맞이했던 그 시기를 추억하며 그는 다른 수식어도 필요 없이
간결하고 참신하게 스물 한 살이 나였던 오월. 이라는 표현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그가 아마 스물 한 살을 기억해내기엔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펜을 잡고 글을 썼으리라.
스물 한살의 그는 분명 여러가지 일이 있었겠지만,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인 망각의 힘을 이용하여
오월의 봄과 녹음만을 기억하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그는 글 끝머리에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이 지나는 아쉬움과 반가움을 글로 표현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