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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신 Aug 18. 2022

어정쩡한 디자인에 대하여

about indecisive design

신시내티 대학교 그래픽 디자인학과 교수였던 고든 살코 Gordon Salchow는 1967년에 교수 경력을 시작하여 2010년 은퇴할 때까지 40년이 넘게 그래픽 디자인 학과의 뼈대를 만들고 가르쳐 왔다. 2010년 10월, 그의 은퇴를 기념하여 수많은 제자들과 학생, 동료 교수들이 강당에 모인 가운데 마지막 강연을 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나의 교수 생활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강연을 하게 된다면 어쩐 주제의 이야기를 할까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고든이 어떤 화두를 던질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었다.


강연을 하기 전, 자신이 요즘 열심히 아코디언을 연습하고 있다고 하면서 자리를 잡고 앉더니 바로 Auld Lang Sine을 연주하였다. 강당에 가득 모인 사람들은 박수를 치면서 또 한 편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순간이 지나고, 오랫동안 강의를 해 온 사람답게 백묵으로 칠판에 강연 제목을 쓴다 - Decisive Design. 40여 년의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흔히 자신의 소회, 후배들을 위한 덕담 정도를 생각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둥그레졌다. '과단성 있는 디자인'이라고 옮겨야 할까, 아니면 '단호한 디자인'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 강연의 주제치고는 좀 독특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rZpk29OX6Y

Auld Lang Sine을 연주하는 고든 살코 교수

작별의 노래를 듣고 마음이 좀 숙연해진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주제에 잠이 확 깬 듯 노교수의 입을 바라본다. 40여 년 동안의 그래픽 디자인 강의를 총망라한 주제, Decisive Design. 이 두 단어에 자신의 디자인 관을 다 담은 것이리라. 당연하다. 마지막 강의에서는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해야지. 이런 면에서도 그의 주제 선정은 decisive 했다.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자주 기억이 나는 이 강의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디자인을 칼로 자른 듯이 과단성 있게 할 것.


좀 더 풀어보면, 우리가 디자인을 할 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디자인을 하게 되거나 혹은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인데도 넣고, 멋지게 보이라고 넣고, 뭔가 있어 보이라고 넣고, 열심히 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넣고, 뭔가 허전해서 뭔가를 더 넣고 하다 보면 결국에는 그럴싸해 보이기는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디자인이 되는 경우를 흔하게 보게 된다. 고든 교수는 문제를 명확히 알고, 방향을 명확이 잡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필요한 디자인을 과단성 있게 해내야 한다는 자기가 수 십 년 전에 가르쳤던, 지금은 큰 이름들이 된 제자들 앞에서 다시 한번 더 당부하고 싶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에는 decisive design의 반대라 할 수 있는 indecisive design, 즉 어정쩡한 디자인이 널렸다. decisive 한 디자인보다 indecisive 한 디자인이 훨씬 더 많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클라이언트의 의중을 반영하다 보니, 명쾌한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는데 열심히 한 것처럼 보여야 하다 보니 이것저것 붙이게 되고 결국 어정쩡해 지기 일쑤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A도 보고, B도 보고, C도 보고, D도 보다 보니 A+B+C+D 같은 것이 되어 버리는 일이 태반이 넘는다. 


오래전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공항에서 영어가 표기된 도로 표지판만 따라 시청까지 찾아 올 수가 없다는 실험 결과가 있었다. 굳이 외국인이 아니더라도 한글 표지판을 따라서 제대로 방향을 찾기도 가능하지 않다. 운전을 하다가 좌회전을 하려면 어떤 차선으로 가야 하는지 아닌지. 이 차선이 좌회전 차선인지 아니면 좌회전을 하면 그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인지. 


금천교를 가려면 좌회전해야 할까, 직진을 해야 할까.


이러다 보니 도로면에 분홍색, 녹색 등의 굵은 선으로 방향을 가르쳐 주는 아이디어가 만들어져서 많은 효과를 보고 칭찬을 듣기는 했지만, 그런 것이 없이도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로 표지판 체계는 수정하지 않은 채 가뜩이나 복잡한 운전 환경에, 한 가지의 정보를 더해준 꼴이 되고 또 눈이 오거나 하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니 이런 것도 문제의 본질을 다루지 않는, 어정쩡한 해결책이 되고 만 것이다. 거미줄 같이 많은 도로면을 도색하고 보수하느라 버려지는 예산은 이 어정쩡함에 묻혀서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못하고.

 

학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부지기수다. 논문을 쓰기 위해 저 논문도 보고, 이 논문도 보지만 결국 나만의 통찰과 연구가 없고, 게다가 게으르기까지 하다 보니 남의 논문을 여기저기 훔쳐다 집어넣어 논문이 아니라 누더기가 되어도 학위를 주니 석사도 되고 박사도 된다. 이러다 보니 디자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문화가, 모든 것의 가치 기준이 다 어정쩡해져서 오히려 decisive 한 쪽이 유난스럽다는 취급을 받게 되기에 이르렀다.


사회를 다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을 decisive 하게 해야 한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디자인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면 곤란하다. 고든 교수의 마지막 강의에서 내가 살아가는 방향을, 사회가 바로 서는 방법을 발견한다.


 





고든 교수는 2018년 자신의 디자인에 대한 철학을 모은 책, About Design: Insights and Provocations for Graphic Design Enthusiasts '디자인에 관하여: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위한 통찰과 자극'을 펴냈는데, 이로 부터 1년 후 뜻하지 않게 일찍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이 책이 유작이 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강의, 또 디자이너가 늘 주제에 대한 민감해야 함을 주는 이야기 해 주는 책이 항상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나를 깨워 주는 커피 역할을 해 주고 있다. 오늘 나의 디자인은, 나의 강의는, 나의 생각은 decisive 한가. 내가 지금 하는 강의가, 만드는 디자인이, 쓰고 있는 책이 마지막 작업이 된다면 그 주제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내 강의를, 디자인을, 책을 어정쩡하게 만드는 것들은 뭔가. 생각이 많아진다 (이러다 보면 결국 어정쩡하게 되는데).



고든 교수의 유작 - About Design


Savannah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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