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자동차 디자인 1980–2000 시리즈 #2
007 영화에 종종 등장하던 에스프리 (Esprit) 라는 스포츠카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그 자동차를 제작하는 로터스 (Lotus)사가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재규어와 함께 영국 스포츠카의 자존심 이라고 할 수 있는 로터스는 에스프리 외에도 에트나 (Etna), 엘란 (Elan) 등의 모델을 생산하고 있는데, 1989 년 10월에 발표된 새 엘란은 제품 컨셉트, 디자인, 엔지니어링 모든 면에서 혁신적인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페라리, 포르쉐 등 유명한 스포츠 카들이 고성능화, 대형화의 추세를 보이는 반면에, 로터스 엘란은 고성능이면서도 현실적인 특징을 가지고 소형 스포츠 카의 다크호스로 부상하고 있다. 차체의 크기가 소형화되는 점은 무엇보다도 영국의 도로 여건에 따른 것으로서, 대륙에 비해 비교적 좁은 형편인 영국에서는 페라리나 포르쉐, 람보르기니 등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다.
또 한가지의 새로운 시도는 종래의 본격 스포츠카들이 RR (리어 엔진, 리어 휠 드라이브) 이나 MR (미드 엔진, 리어 휠 드라이브), FR ( 프런트 엔진, 리어 휠 드라이브) 방식을 채택해온 것과 달리 FF( 프런트 엔진, 프런트 휠 드라이브)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그러한 점 등으로 인해서 엘란은 스포츠 카디자인의 새로운 터닝 포인트로 불리기도 한다.
디자인 측면에서의 엘란은 다른 스포츠카들에 비해 짧달막한 편이고, 늘씬하지도 않다고 할 수 도 있다. 사실 로터스 특유의 감각을 보여주는 에스프리, 에트나 등과는 전혀 다른 감각의, 좀 과장하자면 미운 오리새끼와도 같은 인상이 강하다고 보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첫 인상은 코베트의 늘씬함도 없고, 페라리 F40의 파워감도 없으며, 테스타로사의 아름다움도 없고, 쿤타치의 저돌적인 느낌도 볼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디자인 디렉터인 피터 스티븐스가 노린 점이다. 즉 진보적인 디자인의 자동차는 첫 눈부터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여기서 엘란의 외모를 디자인적인 시각으로 철저히 분석해 보자.
엘란의 프로포션, 즉 차체의 비례감은 일반적인 스포츠카들보다 다소 짧고 둔탁한 느낌을 준다. 이는 FF화에 따라서 1600cc 엔진이 횡치 (Transverse. 엔진이 자동차의 길이 방향이 아니라 좌우 방향으로 놓인 구조) 됨에 따라서 프런트 오버 행이 짧고 노즈가 낮아진 데다가 리어 오버 행을 유난히 짧게 한 때문이다.
엘란의 경우에는 오히려 컴팩트한 느낌과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선의 부드러움이 강조되고 있으면서도, 속도감보다는 당돌함의 이미지를 주고 있다. 이점은 필자가 1994년 영국 Hethel에 소재한 로터스를 방문했을때 과거 미 공군 비행장으로 사용했던 평평한 주행시험장에서의 슬라롬 주행에서 직접 몸으로 느꼈던, 1600cc의 자동차라고는 전혀 믿을 수 없었던 당찬 주행감과 기가 막히게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유로는 자동차의 웨이스트 라인에 일반적으로 달려 있는 사이드 몰딩이 없어서 차체의 사이드 뷰를 상하로 분리시키지 않는 점도 들 수 있다. 니트 (neat) 한 처리 또한 엘란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컨버터블 루프를 수납하기 위한 공간의 커버는 FRP로 제작되어 있는데, 차체와 절묘하게 일체화되어 있다. 이 루프는 완전히 장착하는데 20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루프 자체만 하더라도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종래의 소프트 톱 컨버터블이 루프를 덮으면 마치 천막을 친 듯이 울퉁불퉁해서 차체의 스타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엘란의 경우는 루프 양측의 가이드와 헤더 패널에 있는 조인트 클럽이 보디의 스타일과 적절히 어울리게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누수도 완벽하게 방지하고 있다.
짜임새있는 감각을 더해주는 것은 윈드실드에서 보네트, 노즈, 범퍼를 따라 흐르는 매끈하고도 부드러운 곡면과 짜임새 있는 연결감이다. 리어 스포일러는 루프 스토리지 커버 (storage cover)와 마찬가지로 차체와 절묘하게 조합되어 있다.
프런트 범퍼 내장 시그널 램프는 마쓰다 미야타 (Miata)의 램프를 연상시키면서도 더 슬림하고 일체감이 있다. 많은 스포츠카들이 노즈 부분을 낮게 하기 위해서 채택하고 있는 팝-업 (pop-up) 식 헤드램프도 니트하고 스무드한 디자인을 잘 살려주고 있다.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는 테일 램프는 너무 평평하고 단조로운 수직 패턴으로 분할되어 있어서 전체 디자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마치 다른 차에서 가져온 듯한 인상을 없앨 수가 없다. 엘란의 리어 뷰는 사이드 뷰에 비해서 못하다는 느낌이다.
또 다른 특징은 탄탄한 감각의 디자인으로서, 이는 짧은 전장에 비해 넓은 차체와 짧은 오버행, 그리고 코크 보틀 (coke bottle) 형의 보디 모양 -자동차를 위에서 본 형태가 마치 잘록한 코카콜라 병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 — 등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리고 휠 아치를 형성하는 펜더가 부드러운 블리스터 (blister; 수평으로 길게 물집이 생긴 것처럼 부풀어오른 휀더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것도 탄탄한 느낌을 준다.
엘란의 인테리어는 로터스의 신형 에스프리와 이스즈의 컨셉트 카인 카스피타 (Caspita) 의 인테리어를 디자인한 사이먼 콕스 (Simon Cox) 의 디자인으로서, 전체적으로 부드러우면서도 계기판등이 효율적으로 잘 처리되어 있다. 시프트 레버는 스포츠 카 답게 짧으며, 대부분의 조작장치들은 조작이 편리하도록 큼직하게 배열되어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도어 트림으로부터 시트로 연결되어 흐르는 넓은 밴드 형의 컬러 처리로서, 이 아이디어는 인테리어의 스페이스를 강하게 묶어주는 효과를 내고 있다.
엘란의 이전 모델이 16년 전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독특한 디자인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처럼, 새 엘란의 출현도 스포츠카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다. 디자인 측면에서는 Corvett, Camaro, Firebird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스포츠 카들이 풍기는 스타일리시하고 다소 소모적인 디자인 이미지와도 다르고, MR2, 인테그라 (Integra), 셀리카 (Celica) 등이 주도하는 오밀조밀하고 지나칠 정도로 디테일한 일본의 스포츠 카와도 다른, 또 페라리 테스타로사, F40, 람보르기니 등의 이탈리안 수퍼 스포츠카와도 차별화되는 컴팩트 스포츠카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엘란이 로터스 자동차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는 증거는 당시 발표되었던 새 Esprit의 디자인이 구 모델에 비해 크게 새로운 인상을 주지 않는데 비해서, 엘란은 1983년 초기 프로토타입이 제작된 때에는 디자인과 파워 트레인 모두가 Lotus Etna를 연상시키고 있었다가, 1985년의 두번째 프로토타입을 거쳐 1987년 최종 확정 모델에 이르러서는 종래의 로터스 스타일을 완전히 탈피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엘란은 1996년 한국의 기아자동차에 판권이 넘어가면서, 원래 엔진 보다 더 큰 2000cc엔진을 탑재하게 되어 그러지 않아도 짧은 엔진 후드가 더 높아지고, 테일램프의 디자인도 변경하게 되어 뉴앙스가 많이 달라졌다. 결국 3년 정도 만에 생산이 중단되어 아쉬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