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안나 신 Mar 23. 2022

가장의 무게

5년 전, 난 혼자 버는 여자 친구가 됐다 03

나는 외벌이 가정에서 자랐다. 시골 마을 칠 남매 중 늦둥이로 태어난 아빠는 서울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회계 법인의 부대표까지 지냈던, 그야말로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아름다워만 보이는 아빠의 성공 스토리의 이면에는 수많은 담배꽁초와 소주병이 있었는데, 짐작컨대 흡연과 음주는 아빠의 거의 유일한 취미이자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남들보다 일찍 유명을 달리한 이유이기도 하고.


내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아빠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건강이 좋지 않아 평생을 전업 주부로만 살았던 엄마는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생전 가족들에겐 힘든 내색 한번 않던 아빠가 지니고 있었던 마이너스 통장은 고스란히 엄마의 몫이 되었고, 엄마는 그야말로 고군분투하며 오빠와 나를 키워냈다.




내가 보고 자란 가장은 모두 외롭고 힘들었다. 비단 나의 부모뿐만이 아니었다. 영화나 드라마 속 가장은 모두, 그것이 아버지던 어머니던 혹은 소년 소녀 가장이던,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히 끝까지 가족을 보호하고 이끄는, 아니 그래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5년 전 남자 친구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태국으로 오라고 했을 때 나는 꽤나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제 내가 혼자 벌게 되었으니 외롭고 힘든 나날쯤은 감수해야 한다 다짐했다. 물론 당시엔 그 책임을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할 거란 확신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가볍게 동거나 한번 해보자는 마음도 아니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 동안만큼은 그에게 듬직한 가장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와 외벌이 동거 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 몇 달간 나는 부단히 노력했다. 그가 무료할까 싶어 혼자였다면 절대 안 갔을 관광지와 맛집들을 주말마다 찾아다녔고, 그가 서운해할까 싶어 내 옷이나 화장품을 살 땐 항상 그의 것도 함께 샀다. 그가 괜히 미안해할까 봐 회사 투정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장' 흉내를 내는 나날이 늘어갈수록 나의 외로움과 공허함은 커져만 갔고 내 통장도 힘들어했다.


그가 태국에 온 지 반년쯤 되던 날이었을까. 술기운을 빌려 그에게 처음으로 힘들다 말했다.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라며 한도 없는 신용카드 하나쯤 쿨하게 내어줄 수 있는 여자 친구가 아니라 미안하다 말했다. 그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난 아무것도 필요 없는데. 그리고 내가 그런 것 때문에 널 만난다면 넌 나랑 헤어져야지. 그런 사람 만나지 마."




그때 나를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넣었던 건 그가 아니라 '가장'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나 자신이었다. 그는 나처럼 회사 생활을 해보진 않았지만 다른 사회 경험이 풍부해 세상 물정에 밝았고, 나처럼 영어를 유창하게 하진 못했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야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겐 내 돌봄이 필요 없었다.


가족 중 혼자 경제 활동을 하며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분명 무게감 있는 일이다. 아직도 나는 종종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을 하고, 우리의 삶이 정체된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조급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외벌이 생활을 행복하게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걱정과 책임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힘들게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라 세상 풍파 속에서도 꼿꼿이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든든한 기둥 같은 사람이기에, 나는 그 무게가 필요하고 또 고맙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린 가사 ‘분담’을 하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