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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안나 신 Apr 02. 2022

꿈을 먹고 살다가 꿈이 없는 그를 만났다

5년 전, 난 혼자 버는 여자 친구가 됐다 04

"자기는 꿈이 뭐야?"


“나, 어렸을 때 꿈은 과학자!”


“지금은?”


그가 회사를 그만두고 태국으로 이주한 뒤 처음으로 함께 오른 여행길이었다. 유난히 햇빛이 반짝이던 크라비의 한 바닷가, 차가운 맥주를 홀짝이다 조심스럽게 던진 나의 질문에 그는 예상치 못한 공격이라도 받은 듯 조용해졌다.


"어...... 지금은... 딱히 없는 것 같아. 그냥 자기랑 계속 함께 하는 거?”


그가  초의 정적 끝에 내놓은 대답에 이번엔 내가  말을 잃었다. 갑자기 숨이  막혔다. 딱히 꿈이 없다니. 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난 그때까지 꿈을 먹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꿈을 맹신했다. 물론 인생이 실제 꿈꿨던 방향대로 흘러간 적은 없었지만, 꿈은 내 일상을 정립하는 기준이자 의사 결정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내겐 배우자가 될 사람의 꿈도 중요했다. 서로의 꿈을 응원하다가 마침내 함께 꿈을 이루는 아름다운 성공 스토리. 그건 내가 결혼 생활에 대해 가지고 있던 유일한 로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예전에 일할 땐 어땠어? 그땐 식당을 차리고 싶었어?"


"아니, 예전 회사는 젊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으쌰 으쌰 해보려고 간 거야! 요식업이란 산업 자체도 흥미롭긴 했지. 근데 난 그냥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하는 편인 것 같아. 꿈이라 부를 만큼 내가 잘 알고 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건... 적어도 일적으로는 아직 없는 것 같아! 그러는 자기는? 자긴 꿈이 있어?"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전에는 앵무새처럼 잘만 되뇌었던 내 꿈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미국 MBA, 호주 이민, 구글 입사…  생각해보면 모두 내가 잘 모르고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하기 싫었다. 여행조차 가본 적 없는 미국과 호주는 이름만으로도 낯선 나라였고, 구글에서 일해도 어차피 똑같은 회사원이니 지금 받는 스트레스를 더 받으면 받았지 덜 받을 것 같진 않았다. 학교에 다시 들어가서 수업을 듣고 논문을 쓰는 건, 더군다나 그걸 엄청난 돈을 들여서 하는 건 정말 싫었다.


그렇다면 난 대체 무엇을 위해 피곤하고 치열한 하루를 보냈던 걸까.


사실 내가 어렸을 적 처음으로 가진 꿈은 엘리베이터 안내원이었다.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안내원의 모습은 마치 건물 안에 있는 비행기를 운전하는 조종사 같았다. 그래서 학교에서 처음으로 받은 가정환경 조사서의 장래 희망란에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엘리베이터 안내원'이라 적었다. 그러나 이를 본 부모님은 이런 일은 공부 못하는 애들이나 하는 거라며 화를 내셨고, 나는 황급히 연필을 들어 그 위에 두줄을 찍찍 긋고 외교관이라 고쳤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 스스로 하고 싶은 일과 남들에게 보여주기 좋은 일의 경계가 희미해진 게.


내가 그 이후로 가졌던 꿈과 목표는 모두 지극히 '타당한 경로'에 있었다. 어렸을 땐 가족이나 친구를 기준으로 이를 판단했던 반면,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나와 비슷한 길을 걸은 이들을 기준 삼았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정황상 당연히 그 길을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오빠를 따라 민사고 시험을 봤고 친구들이 목표하는 아이비리그 대학에 지원했다. 아빠의 뒤를 잇고 싶어서 학부 전공도 회계학을 1순위로 택했다. 경영학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엔 컨설팅 회사 면접을 수도 없이 봤다. 테크 업계에 발을 들이고선 구글, 페이스북같이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의 문을 쉬지 않고 두들겼다.


그리고 모두 실패했다. 미국 대신 홍콩으로 유학을 갔고, 컨설팅 회사를 버티지 못해 테크 스타트업에 갔다. 스타트업을 전전하며 지원했던 대기업은 서류 통과조차 못해봤다. 내 관심사와 성향을 고려하면 내가 그때 차선책이라 믿었던 것들은 다 나의 최선책이었지만, 당시에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엄청난 열등감과 자괴감을 느꼈다. 애초에 내가 원한 꿈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꿈에 집착하던 내가 꿈이 없는 그를 만난 건 인생 최대의 전환점이었다. 꼭 해야 하는 일이 없으면 해 볼 수 있는 일이 그만큼 많아진다는 걸, 작가 등단의 꿈 없이도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고 소중한 인연을 만날 수 있다는 걸, 그가 없었다면 아마 평생 몰랐을 것이다.


몇 년에 걸친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온 지금,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거야 모르지!"


양가 어른들을 다소 걱정시키는 이 무계획의 이면에는 사실 더 많은 기회와 재미가 숨어있다. 우린 지금까지 기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 달려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에겐 정해진 종착지가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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