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벌이 여자친구에서 외벌이 아내로 01
나는 결정을 잘 뒤집는 편이다. 학창 시절엔 등록 예치금까지 낸 미국 유학 대신 재수를 택했고, 사회에 나온 뒤에는 각고의 노력 끝에 합격한 면접이나 입사 의사를 철회한 적도 몇 번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경솔하고 변덕스러워 보일지 모르겠으나 실은 생각이 많은 성격 탓에 안 그래도 힘들게 내린 결정을 '이게 내게 정말 최선인지' 끝까지 곱씹고 또 곱씹기 때문이다.
결혼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애를 시작한 지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덥석 반지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로 지낸 5년간 결혼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와 함께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기보다는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대한 의문이었다.
단지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고 해서 꼭 결혼을 해야 할까? 그게 정말 내게 최선일까?
만약 우리가 한국 사회의 통상적 기준에 맞는 결혼을 해낼만한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면 실제 그랬던 것보다 더 빨리 부부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늘 성장과 경험의 기회를 쫓느라 바빴던 우리에게 결혼은 감당하기 어려운 사치처럼 느껴졌다. 평범한 월급쟁이었던 내가 혼자 벌어 들이는 소득은 한정적이었고, 3년에 한 번 꼴로 국경을 넘어 이주를 할 때면 그나마 있던 여윳돈도 증발해 버렸으니까. 신혼집은 커녕 결혼식을 올릴 여력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가 터졌다.
싱가포르의 국경은 갑작스레 봉쇄되었고 각종 비자의 신규 발급 또한 사실상 중단 상태였다. 관광 비자로 체류하던 그는 비자런이 불가능해지자 홀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간 그는 경제 활동을 재개했고 우린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극적인 갈등은 없었다. 장거리 연애에서 흔히들 겪는다는 사무치는 그리움이나 의심, 오해 같은 것도 없었다. 오래간만에 혼자 일상을 보내며 난, 오히려 깨달았다. 그는 결혼 없이도 이미 내 삶의 일부였고, 남편이란 명칭 없이도 이미 나의 동반자였음을.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하루하루를 더 빛나고 다채롭게 만들어 주는 존재였음을.
돌이켜보면 결혼이 아니라 우리가 결혼 없이도 매일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이 사치였다. 길어야 한 달일 것이라 여겼던 입국 규제가 두 달을 넘기고 세 달을 향해갈 무렵, 내게 결혼은 더 이상 최선인지 여부를 고민하는 '목적지'가 아니었다. 기약 없이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답답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메신저로 결혼하자 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혼인 신고를 하면 동반 비자가 나오니 할 마음이 있냐 물었다. 연애 6년 차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MBTI에 T가 섞여있어서였을까. 나의 프로포즈 아닌 프로포즈에 돌아온 그의 답변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어머님 언제 뵈러 가지? 도장이랑 신분증 있어야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