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벌이 여자친구에서 외벌이 아내로 02
엄마는 내가 어릴 적부터 누누이 말씀하셨다. 결혼할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은 굳이 만나볼 필요가 없으니 알아서 잘 만나라고. 양육에 있어 원체 자유방임주의긴 하셨지만 그래도 자식의 연애사가 걱정되고 궁금하셨을 법도 한데, 요즘 만나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 한 번조차 먼저 하신 적이 없었다.
내가 그와 태국에서 동거를 시작할 때도 엄마의 반응은 담담했다. 이혼보다는 파혼이, 파혼보다는 이별이 낫다며 정말 마음이 맞는 사람이라면 결혼 전에 같이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겠냐 응원해 주셨다.
당시엔 결혼에 대한 명확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주변에 몇 년째 동거만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대꾸했지만, 막상 결혼을 결심하고 나니 엄마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보통의 결혼 소식이 아니었다. 우린 결혼식도, 혼수도, 예단도, 신혼집도, 결혼반지도, 상견례도 없이 ‘혼인 신고’만 할 계획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싱가폴의 비자 승인이 언제 중단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난 이 소식을 가능한 한 빨리 전해야만 했다. 그것도 원격으로.
난 엄마와 사이가 꽤 좋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엄마에게 그와의 결혼을 허락해 줄 수 있겠냐 물을 생각은 없었다. 여러모로 사회의 통념을 거스르는 우리의 결정이 축하받을 수 있다면 참으로 감사할 일이지만, 설사 쓴소리가 돌아온다 할지라도 한 귀로 흘려버릴 작정이었다.
그간 그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것도, 그로 인해 나의 일상이, 그리고 나란 사람이 얼마나 빛나게 되었는지 가장 잘 아는 것 또한 나니까. 엄마를 비롯한 남들이 그걸 몰라준다 할지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따라 따-따 따라 따-따 따—’ 보이스톡 신호음을 들으며 10초 정도 기다렸을까.
“어 조안나~”
“응 엄마! 혹시 집에 내 인감도장 있어?”
“응 있는데. 왜? 은행에 볼 일 있어?”
“아니~ 혼인신고에 필요하다고 하더라고! 내 신분증이랑 인감도장 좀 찾아서 남자친구한테 전해 줄 수 있어?”
나의 갑작스러운 펀치에 엄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와 하는 결혼이라서가 아니라 여느 부모가 자식의 결혼식에서 눈물을 훔치는,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는 홀로 우리 엄마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고 신분증과 도장을 받아 곧장 구청으로 향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고 한편으론 조금 아쉬웠다. 결혼식은 안 해도 혼인신고는 같이 손 잡고 가서 할 줄 알았는데.
부모의 주민번호부터 내 본적까지, 써야 하는 칸이 은근히 많았던 혼인신고서를 메신저로 함께 써 내려가며 역시 인생은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인생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