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간송미술관
※ 12월 뉴스레터 <궁궐에서 온 편지>에 실은 글입니다.
(대구간송미술관)
우리 문화유산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과 간송미술관에 대해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엄청난 재산을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아낌 없이 쓴 분이죠. 한 예로 고려상감청자로 알려진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일본인 골동상에게 거액 2만 원을 주고 구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이때 2만 원이면 서울에 있는 기와집 20채를 매입할 큰돈이었습니다.
지난 늦여름 대구간송미술관이 개관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개관을 기념해 <여세동보與世同寶 : 세상 함께 보배 삼아> 전시가 개최된다는 소식도 함께 말이죠.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비롯해 훈민정음 해례본과 미인도,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금동삼존불감 등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간송미술관 소장품 97점이 나오는 특별전이었습니다. 모든 작품이 대단한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들인데요. 이 보물들을 보고 싶어 새벽 기차를 타고 대구에 다녀왔습니다.
대구간송미술관은 대덕산 중턱에 자리합니다. 바로 옆에 대구미술관이 있어 두 미술관 전시를 함께 둘러보기 좋은 위치입니다. 대구간송미술관 마당에서 멀리 대구 시내 전경을 볼 수 있었는데요. 오랜 만에 뻥뚫린 경치를 감상할 기회였습니다.
인기가 많은 전시라 평일 1회 차 예매를 하고 갔지만, 역시나 관람객이 정말 많았습니다. 4개 전시실에서 작품을 전시 중이었고, 1개 전시실에서는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제작한 <흐름·The Flow>라는 실감영상을 재생하고 있었죠.
전시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궁금했던 작품은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미인도,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이었어요. 오래전에 다른 전시에서 본 작품들인데, 이번 전시에 다시 나온다고 하니 반가웠거든요. 그런데 이 전시에서 제 마음을 붙잡은 작품은 ‘백자사옹원인’이었습니다.
‘사옹원(司饔院)’은 조선시대 왕실 가족들이 먹던 음식을 준비 하던 관청입니다. 식자재뿐 아니라 음식을 담던 그릇까지 사옹원이 준비했는데요. 많게는 400여 명의 인원이 사옹원에 소속되어 일사분란하게 음식을 준비해냈죠. 백자사옹원인은 이 사옹원에서 쓰던 인장입니다.
이 인장이 눈길을 끈 건 우선 색깔 때문이었어요. 살짝 푸른 빛이 도는데 분위기가 참 묘했습니다. 분명 백자인데도 살짝 부는 봄바람에 수면에 잔물결이 치듯 파란 색감이 보일 듯 말 듯 인장 전체에 분명 남아 있었습니다.
크기는 인장의 특성상 한손에 딱 잡힐 정도였어요.(높이 10.5cm) 전체 형태는 사자를 조각한 상부와 글씨가 새겨진 하부 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司饗院印’이라고 쓰여 있을 글씨를 찍어 함께 전시해두면 좋았을 덴데 인장만 놓여 있는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나중에 서울로 돌아와 이 아쉬움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아래 소개합니다.)
실은 제 마음에 이 인장이 딱 꽂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요. 바로 상부에 조각한 사자의 얼굴과 뒷모습 때문이었어요. 궁궐에서 사용하던 물건에는 행여 나쁜 기운이 담장을 넘어 들어올까 싶어 이를 막기 위한 바람을 담아 해태와 사자, 용, 봉황 등의 동물을 그리거나 조각해 넣습니다. 동시에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어요. 그렇다면 이런 동물들의 모습이 무섭거나 권위적이어야 할 텐데, 실제로 보면 그런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아 오히려 재미 있습니다. 이 인장도 마찬가지였어요.
사옹원은 정치적으로 핵심 부서는 아니었지만, 왕실의 음식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관청이었습니다.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이 직접 먹는 음식을 준비하는 부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죠. 이 과정을 감시, 감독할 때 쓰던 인장이었으니 백자사옹원인 또한 매우 중요했을 거예요. 그래서 다른 동물도 아니고 사자 조각을 새긴 것일 테고요. 그런데 실제로 본 모습은 귀엽기만 하더라고요.
나름은 눈을 부릅뜬 채 정면을 보고 있는 사자의 표정이며, 왼발로 여의주를 턱하니 짚고 있는 자세도 그렇고…. 제 눈에는 데굴데굴 굴러오는 장난감 공을 놓치지 않고 ‘딱’ 붙잡고는 칭찬을 바라며 주인을 쳐다보는 강아지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어둑한 전시실 안에서 본 사자의 뒷모습에도 참 마음이 끌렸는데요. 가지런히 모은 짧은 다리며, 돌기 솟은 말린 꼬리, 그리고 둥글둥글한 엉덩이가 함께 보였습니다. 가만 보고 있으니 귀엽기만 하더라고요. 당장 사자가 여의주를 물고는 제 앞으로 껑충 뛰어와 놀아달라며 꼬리를 살랑 흔들 것만 같다고 할까요.
조선시대 도공들은 도대체 어떤 훈련을 받았길래 이 정교한 조각과 빛깔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이 귀한 보물을 손에 넣은 그때 간송의 마음은 어땠을까. 백자사옹원인을 한참 바라보며 상상하고, 또 상상하다 돌아왔습니다.
전시를 함께 본 친구가 인장 글씨가 궁금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글씨를 찍어 옆에 두면 좋았겠다고 저도 생각했는데요. 전시를 보고 서울로 돌아온 며칠 후. 이 백자사옹원인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전시 소식을 들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진행하는 <궁중음식, 공경과 나눔의 밥상>(~2025. 02. 02.) 전시입니다. 궁궐 음식을 기록한 문헌과 그림 자료, 식기와 조리도구, 상차림 등을 둘러볼 전시인데요. 이 편지를 보내고 곧바로 이 전시를 보러 국립고궁박물관에 갈 생각입니다. 백자사옹원인의 인장 글씨는 어떻게 생겼는지, 전시를 본 소감은 어떤지 등은 다음 편지에 담아 보내드릴게요. 아래 사진은 전시를 소개한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 ❮여세동보與世同寶 : 세상 함께 보배 삼아❯ 도록을 참고해 정리했습니다.
※ 12월 뉴스레터 <궁궐에서 온 편지>를 보내고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진행하는 <궁중음식, 공경과 나눔의 밥상>을 관람하고 돌아왔는데요. 이 전시에 백자사옹원인 관련 유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궁중음식, 공경과 나눔의 밥상> 전시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포스팅하겠습니다.
<‘궁궐을 걷는 시간’ 소개>
문화유산교육 전문가. 숲해설가. 2024 궁중문화축전 ‘아침 궁을 깨우다’ 진행.
서울의 다섯 궁궐을 매달 특별한 주제를 정해 산책하는 프로그램 ‘궁궐을 걷는 시간’을 진행하며, 궁궐 산책과 우리 문화유산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뉴스레터 <궁궐에서 온 편지>를 발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재밌게 걷자! 경복궁⟫, ⟪재밌게 걷자! 창덕궁•창경궁⟫, ⟪재밌게 걷자! 덕수궁•경희궁⟫, ⟪궁궐 걷는 법⟫ 등이 있다.
※ 인스타그램 : @gungw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