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홍 Jun 20. 2024

빵점의 추억

인생 첫 빵점이 이따금씩 생각나는 이유


'0.'


 딸이 학교에 다녀와서 0점짜리 시험지를 내밀 줄 엄마는 상상이나 했을까? 나머지 공부는 기본이고 차라리 점수였으면 싶은 등수를 받아올 때도 그녀와 그의 딸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상에 빵점이라는 게 존재하고 그 빵점이 자신의 딸, 혹은 본인이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어린시절 난 공부는 드럽게 안하면서도 학생으로서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알아서 시험을 볼 때마다 주눅이 들었는데 사실 엄마는 별 말이 없었다. 그녀의 교육관은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웠고 덕분에 난 3개년 학습과정쯤은 한글처럼 떼고 온 친구들과 다르게 백지 상태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때문에 입학하면서부터 구구단을 외는 친구들과 다르게 난 더하기부터 손가락, 발가락을 동원해가며 골머리를 앓았다. 더군다나 당시에 막 불기 시작한 선행 학습, 사교육 열풍은 나와 또래친구들의 격차를 더 벌어지게 하는 등 시련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래도 국어는 자신 있는 편이었다. 책은 많이 읽는 편이었고 일기 쓰기도 좋아했으니까.


근데 빵점이라니.


 인생에 한 번도 겪기 어려운 빵점을 수학도, 다른 과목도 아닌 받아쓰기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나에게도 충격적인 일이라 벙쪄있는 와중에 선생님은 시험지에 부모님 사인을 받아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천근만근으로 집에 도착해 시험지를 잘 보이는 주방 테이블에 놓아두고 거실 소파에 앉아 어디 문구점에서 눈깔사탕이라도 훔쳐먹다 걸린 사람마냥 무언의 체벌을 기다렸다. 


"진짜 빵점이야?"


 외출했다 돌아온 엄마는 안경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적셨다. 차마 대답도 못하고 쭈뼛대다 신음인지 대답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엄마를 올려다 봤는데...엄마가 배꼽을 잡고 있었다. 깔깔깔.

 엄마가 마침 잘됐다며 장바구니를 열더니 갓 사온 크림빵을 꺼냈다. 백점보다 어려운 게 빵점이 아니냐며 크림빵 포장지를 벗겨 입에 넣어주던 엄마는 진심으로 신나보였다. 빵점이니까 빵을 먹어야 한다며 다음에 또 빵점을 받아오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엄마가 저래도 되나싶으면서도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보아하니 진짜 별 일이 아닌 것 처럼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평소에 쳐다보지도 않던, 크림이 잔뜩 들어간 시장표 크림빵은 그날따라 더 달고 아쉽게 느껴졌다.

 이후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제 스스로 학업을 시작한 후로는 엄마의 그런 교육관에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이나 집의 크기, 통장 잔고처럼 또 다른 숫자에 연연해가며 살아가고 있는 요즘엔 그때 먹었던 크림빵 맛이 이따금씩 생각난다. 지나고보니 그깟 시험점수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지금 내가 겪는 갈등이나 불안도 그 언젠간 받아쓰기 시험점수처럼 별 것 아닌 일이 될까.

 그러니 가난할지언정 숫자에 연연하며 살지는 말자 다짐해본다. 그때 내가 먹었던 크림빵은 숫자에 매몰되는 삶을 살지 말았으면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먹었던 것이라 생각하면서.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