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커플의 임신, 출산 그리고 육아 - 10 주차
"여기서 먹으면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을 더 말해야 해?"
오늘 여자친구는 하리보 젤리를 몰래 먹다 도서관 사서에게 두 번이나 주의를 받았다고 했다.
요 며칠 주의를 받은 뒤로는 혹여 들킬세라 필통 속에 숨겨놓고 하나씩 몰래 꺼내 먹고 있었는데, 결국 사달이 난 것이다.
영국인들은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요청할 때 I'm sorry 혹은 Excuse me로 최대한 정중하게 말문을 여는 경향이 있다. 물론 정중함 보다는 비꼼의 목적일 때도 있다.
Excuse me. Can you please get out of here?
(죄송하지만 꺼져줄래요?)
그런데 'How many?' , 'should I'라는 표현을 사용해 말했다는 건 그 사서 아줌마가 극대노했다는 의미였다.
여자친구는 억울해했다. ‘저는 임산부고 이 젤리라도 먹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다고요!’라고 항변이라도 하고 마음이라고 했다.
임신 2달째에 접어들자 여자친구는 입덧을 하기 시작했다.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아졌고, 약간의 허기를 느낄 때마다 엄마가 보내줬다는 말린 사과, 말린 고구마 그리고 하리보 젤리를 오물거렸다. 그녀 엄마는 당신이 보낸 간식을 딸이 입덧 음식으로 먹고 있다고 상상이나 할까?
입덧을 시작한 후로 먹은 것을 토해내고, 입맛이 없다는 여자친구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공감해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먹고 싶은 게 없냐' '마트 가서 간식이라도 사다 줄까?' 형식적으로 물어볼 뿐 남자인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입맛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입덧 중 먹고 싶다는 음식이란 게 고작 마트에서 파는 1,500원짜리 하리보 젤리라니.
한겨울에 딸기를 찾아 온 동네를 헤매었다는 어느 남편에 비하면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던 건가?
세발낙지 탕탕이나 노릇하게 구운 담양 떡갈비를 찾지 않은 건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임신 10주 차에도 우린 여전히 각자의 '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특히 여자친구가 살던 킹스크로스역 근처 셰어하우스의 2평 남짓한 방. 개인에게 허락된 한 뼘 남짓한 냉장고 공간, 열악한 주방,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 사정까지 먹고 싶은 게 있다고 요리해 먹거나 마음껏 사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됐다.
그래서 하루 15시간 영국법과 씨름하는 여자친구에게 하리보 젤리는 '음식'이라기보다는 '위안'을 주는 벗에 가까웠을 거다. 그런데 소리 내지 않고 먹는 작은 젤리마저도 제지를 당하니 억울할 수밖에.
마음껏 음식을 만들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아니 적어도 입덧이라도 마음껏 눈치 안 보고 할 수 있는 우리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자면 내가 준비 중이던 도시락사업 '투파운즈밀'에 관해 어떤 것이든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