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리 못하는 요리사입니다.
어린 시절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에 나는 언제나 '요리사'라고 적었다. 그중에서도 중식요리사.
화난 용의 입에서 뿜어져 나올 법한 사나운 불 거침없이 다루며 큼지막한 웍을 돌리는 TV 속 중식 요리사의 모습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대학들의 과거 입결에 맞춰 모의고사 성적을 가지고 입시 전략을 짜던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같은 목표 대학을 적어냈다.
고3 초, 전략적으로 수학2를 포기하고 수리나형만 준비하겠노라고 말씀드렸을 때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던 수리 2 선생님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3년을 내리 같은 반이 된 친구에게서 '넌 하고 싶은 게 정해져 있어서 부럽다.'라는 소릴 들을 만큼 나는 '꿈'에 있어서는 나름 확신에 차 있던 전략적인 돌아이? 였다.
나는 멋지게 목표한 대학에 진학했고, 우주 최강 '중식 요리사'가 될 거라고 자신했다.
'바람인가요. 그저 흔들리는 나뭇잎이 떨리듯 두려운 맘이'
오전 7시 반 호텔 셔틀버스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는 듯 굉음을 내며 워커힐 언덕을 오르던 순간. 한강 맞은편 미사리 쪽에서 해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이고,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브라운아이드소울의 '바람인가요'가 흘러나왔던 그 장면이 16년이 흘렀어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지금도 브라운아이드소울의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군대를 가기 전 나는 워커힐 호텔 중식당의 동계 인턴을 지원했다. 4시간이 넘도록 이쑤시개로 새우 내장을 뺐다. 회장님 입맛에 맞췄다는 김치를 정갈하게 담는 법을 배우고 후식으로 내갈 과일을 작은 접시에 옮겨 담는 일을 했다. Walk-in 냉장고를 정리하고 꽝꽝 얼어붙어버린 냉동창고의 얼음을 깨부쉈다.
나는 그 어느 것 하나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10시간 넘는 고된 노동 중에도 새로운 식재료만 보면 눈을 반짝거리는 다른 인턴생들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2007년 12월 31일 그렇게 나는 요리사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2022년 11월,
"영국 법인에서 연간 400억 원 규모의 SI사업의 월별 분기별 매출을 추정하고 트래킹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재무적인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현지 개발팀과 본사 사이의 브리지 역할을 맡았고"
"해외 법인의 SI사업이라는 게 어디까지나 본사에서 주도하고 법인은 보조역할 아닌가요? 지금까지 설명해 주신 게 지원자분 역량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은데... 혹시 추가로 하실 말 있으면 해 주세요."
그랬다. 재무팀장이라는 이 면접관은 마치 내가 영국에서 한 일을 모두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 그 어떤 대답에도 놀라거나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를 포장하고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어필하려고 해도 이 사람은 '네가 한 일이라는 게 어떤 수준인지 모두 알고 있으니 허풍 떨지 마'라고 응수하는 듯했다.
'망했다.'
1차에서 대화를 나눈 매니저는 꽤 말이 잘 통한다고 느꼈다. 재무팀이지만 재무적인 역량을 갖춘 사람은 많다고, 그보다는 사업 경험도 있고 다양한 경험을 한 내 이력에 큰 흥미를 느꼈다고 했다. 그런데 예정에 없던 1.5차쯤 되는 면접에 툭 튀어나온 이 면접관이 내가 애써 부풀려 놓은 거품에 물을 뿌리는 게 아닌가.
여기서 구색 좋은 말을 내뱉어도 좋은 피드백을 이끌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당황해 얼굴이 화끈했지만 패배를 인정하고 마무리하기로 했다.
"네 사실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근데 제 이력과 전공을 보셨겠지만 저는 요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 스스로를 증명해 보여야 했습니다."
"재무를 전공한 그들보다 기술은 떨어질 수 있겠으나, 저는 사업을 해봤고 각각의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증명해 보일 자신이 있습니다."
면접관 당신이 생각하는 게 사실 다 맞고 사실 허풍에 가깝다고 지원자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라니.
고해성사가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든 운 좋게 1.5차를 통과했고 4시간 동안 이어진 최종 면접을 거품 없이 깔끔한 맛으로 이겨낸 끝에 이 회사 재무팀에서 일하는 유일한 '요리사'가 되었다.
(실제로 같이 일해 본 그 1.5차 면접관이라는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고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어느 날 집 근처에서 먹은 돼지갈비가 무척이나 맛있었는지 놀이터에서 놀던 아들이 뜬금없이 '돼지갈비'집에서 일하겠단다.
나는 너무 멋있을 것 같다고 나랑 나중에 같이 일하자고 맞장구를 쳤다. 거기서 일하면 갈비도 실컷 먹을 수 있고 네가 먹었던 그 돼지갈비 어떻게 만드는지 배워서 너도 멋진 사장님이 되라고 말해줬다.
나는 '아이가 커서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거나, 아이에게 '뭐를 하고 싶냐'라고 굳이 묻지 않을 생각이다. 12년의 품어 온 요리사의 꿈이 1달 만에 깨진 자가 아들에게 '장래희망'을 말할 자격이 있나?
나는 다만 12년간 하나의 꿈을 좇느라 다른 꿈을 경험해 몰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실수를 아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만 도와줄 생각이다.
12년 동안 오직 갈빗집 사장을 꿈꿔오던 아들이 갈빗집에서 일해보고는 내 꿈이 아니라고 말하면 꽤나 곤란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