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혁 Oct 05. 2023

영국 창업가 비자를 받다.

유학생 커플의 임신, 출산 그리고 육아 - 12 주차

"프레젠테이션 시작하기 앞서 먼저 배를 채우고 시작하면 어떨까요?"


아시안 학생의 당돌한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내내 근엄한 표정을 짓던 심사위원들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다.

'창업가 비자'를 받게 될 10개 팀을 선정하는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이 있는 날.


당일 아침 심사위원에게 주려고 준비한 제육컵밥 - 재료를 각각 락액락에 담아와 5인분을 준비했다.


제육컵밥을 가져가기로 결정한 건 그들 눈엔 음식사업에 불과할 것이기에 말보단 보여주고 맛보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어진 10분을 채워가기엔 여전히 부족한 나의 영어 실력도 물론 한 몫 했다.


나는 준비해 간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저는 영국 대학생들이 끼니는 거르고 있는 상황을 인지하고 이 사업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영국 대학생들은 평균적으로 5,000만 원가량의 학자금 대출을 받은 상태이고, 교내 단체급식업체는 그들의 독점적인 지위를 활용해 외부 음식이 캠퍼스로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막고 있습니다."

"6개월 간 대학생들의 이동경로, 생활패턴, 식습관을 분석했고 이를 토대로 2파운즈밀을 기획했습니다. 총 3번의 파일럿 테스트를 통해 지금 보시는 것처럼 20-30인분의 주문을 사전에 받아 도서관 앞으로 가져다주는 콘셉트를 완성했습니다. 개별 주문마다 배달비를 별도로 청구하지 않을 수 있고 저희 2파운즈밀은 배달에 소요되는 자원을 아낄 수 있습니다. 외부 주방에서 배달만 해주는 형태이므로 교내 급식업체의 사업권을 침해하지도 않습니다"

"감자칩과 초코바로 끼니를 때우는 영국 대학생들의 열악한 식생활을 개선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내 심사위원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비지니즈의 의도는 잘 알겠습니다. 근데 이게 런던에서도 가능합니까? 주방시설 운영을 하려면 학생이 제시한 한 그릇에 4,000원의 판매가격으로는 절대 운영이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네, 맞습니다. 제가 보여드린 2파운즈밀 사업모델을 런던에서 운영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몇 차례의 파일럿 테스트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사업 거점을 어디로 할 것인가는 여전히 고민 중입니다."

"이 컵밥이라는 아이템이 1인분에 원가가 얼마고 순이익이 얼마죠?"

"제 손에 있는 이 영수증은 여러분들이 드시고 계신 제육덮밥의 재료를 구입할 때 받은 영수증입니다. 총 5.5파운드가 들었죠(약 9,000원). 실제 원가는 1파운드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 여기서 원가는 20% 이상 낮출 수 있고 따라서 예상하는 순이익은 1인분에 20%입니다. 다만 여러 테스트를 통해 학생들이 2-3인분을 주문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먹는다는 의미인데요. 두세 명이 나눠 먹을 수 있는 10,000원 이내의 사이드 메뉴를 추가로 구성하면 수익성은 25-30% 까지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업성이 충분하다고 확신합니다."

"그럼 2파운드가 아니잖아요?" (일동 웃음)

"네, 인정합니다. 2파운즈밀은 브랜드의 상징이 되는 베이직 메뉴의 가격을 의미하고 수익성이 높은 메뉴를 통해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할 계획입니다."


그 순간 나는 미생의 장그래였다.


"네 수고했습니다."


영국으로 유학 온 아시아 학생 99.5%가 졸업 후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통계. 유학의 시작과 동시에 귀국이 정해진 운명. 나는 돌아갈 수 없었다.

단기 알바 - 인턴 - 계약직을 거쳐 입사한 지 26개월 만에 꽤 건실한 식품회사의 정규직이 됐다. 그리고 정확히 6개월 만에 정규직을 그만두고 온 유학이다.

단지 회사일은 조금 더 일찍 시작했다는 이유로 학벌 좋고 스펙 좋은 친구들 사이에서 꼴에 '선배' 노릇을 했지만 내 스펙이라는 건 고작 3년의 회사생활 경력, 그리고 조리학과 졸업.

대학원 졸업이라 한들 1년에 불가한 유학생활, 누구 하나 관심 가져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나는 절대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 하나라도 결과물을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근했다.


그렇게 체류 연장 방법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졸업자 창업 비자'라는 것이었다. 영국 대학교 졸업자 가운데 사업성이 인정되는 스타트업을 기획한 자에게 영국 정부에서 2년 체류를 보장하는 제도.


“그래 이거다.”


영국 대학원 생활은 시작과 동시에 스타트업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사업성을 검증하는데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리사의 길을 포기한 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는 역설적이게도 '음식'이었다. 2016년 당시 K-pop에 대한 관심이 점차 한국 음식, 문화로 옮겨가던 시점이라 학생들이 내가 만든 한식에 큰 관심을 가져준 것도 사업을 기획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기숙사에서 몰래 음식을 만들고 오전 장사를 안 하는 술집 주방을 빌려 닭갈비를 볶았다.

젊은 애들 반응을 보겠다며 클럽 앞에 무료로 나누어 주려다가 쓰레기 취급을 받고 결국 제육덮밥 혼자 먹어치워야 했고, 도서관 앞에 배달을 갔다가 학생식당 관계자의 항의로 교내 보안요원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본교 학생의 스타트업이라도 그들에겐 그저 사업독점권을 침해하는 '적'일뿐인 처절한 자본주의)


학교 도서관 앞에서 주문받은 음식을 배달한 첫날. 뭐가 그리 떨리고 쑥스럽던지

그렇게 제발 단 한 번이라고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던 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며칠 뒤 대학 비즈니스센터장 이름으로 온 이메일 한 통


안녕하세요 Mr. Kim

2poundsmeal이 2016년도 Brunel 대학교의 스타트업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2poundsmeal은 앞으로 2년간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지원과 함께 2년의 사업 비자를 보장받게 됩니다.

졸업자 창업비자 신청을 위해 아래 목록의 서류를 준비해 학생센터를 방문해 주세요.

(중략)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Mike


학교의 창업가 프로그램을 총괄하던 디렉터의 합격 메일.

유학 초기 다짜고짜 그를 찾아가서는 “저는 영국 창업가 비자를 받아야 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고 물었더랬다.

황당하다는 듯 나를 훑어보던 사람.

창업 아이디어에 대한 고민 상담도 아닌 비자 받는 법을 알려달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난 참 무지했고 무례했다.

”네 질문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비지니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부터 하고 제대로된 질문을 해달라.“라고 화가 많이 난 모습에 난 꽤나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그랬던 디렉터에게서 받은 축하 메일이라니! 만세! 만세!


주방에서 "나 창업자 비자 됐어!"라고 적은 주문지를 받은 여자친구가 옅은 미소를 띄며 방금 만들어 올린 비빔밥 그릇을 채갔다.


우리는 절대 돌아갈 수 없었다.









작가의 이전글 장래희망에 대한 고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