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밥 사업, 독박육아의 중간
올해 초 영국 중부 지방도시인 셰필드에 집을 구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지방 병원임에도 산부인과 시설은 런던의 그것과 비교해 절대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환자가 적은 덕인지 아내에게 좀 더 신경 써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집 값은 런던에 1/3 수준이었기에 본가에서 융통한 생활비를 아껴 쓰고 컵밥 20-30인분을 팔면 그럭저럭 반찬 두어 가지를 놓고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제 태어난 지 200일을 갓 넘긴 아들과 우리 둘은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에 꽤 잘 적응해 갔다.
"너 안 따라가. 따라가면? 하루종일 갓난쟁이 보라고? “
"그럼 나 런던 가면 너랑 애랑 둘이 살면? 너 컵밥 장사한다고 나가면? 돌도 안 지난 애를 집에 혼자 둘 거야?"
"육아하려고 비싼 돈 들여서 유학 오고 창업비자받겠다고 이 개고생 한 건 아니야. 방법이 있겠지"
"그래 나도 몰라 네가 알아서 보모를 구하든, 애 업고 배달을 가든지 알아서 해"
‘그 날’이 다가올수록 우리 둘은 서로에게 날을 세웠다.
아내는 마침내 한 영국 로펌의 실무실습 변호사가 되었다. 옥스퍼드, 캠브릿지 법대 졸업생들 사이에서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이뤄낸 대단한 결과였다.
그러나 정식 변호사가 되려면 앞으로 2년 간의 혹독한 트레이닝 과정을 수료해야만 했고, 밤낮없이 일해야 하는 신분이라 회사가 있는 런던 가까이에 집을 구해야만 했다.
셰필드 생활을 정리하고 아내를 따라 런던으로 가든지, 나와 아이만 남든지 결정해야 했다.
한국 양념 치킨을 메뉴에 추가한 뒤로 나의 컵밥 사업은 꽤나 순항 중이었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온라인으로 전단지를 만들어 뿌린 지 몇 주만에 유학생뿐 아니라 현지 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극적이지 않았지만 매주 주문이 늘었고, 주문자 목록에 낯선 이름이 보일 때마다 희망이 커졌다.
이 기세라면 내 가게를 얻어 제대로 장사를 했을 땐 이 지역 명물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넌 항상 시작은 화려한데 끝은 흐지부지해.’ ‘뭐 하나 진득하게 하는 게 없어’
어린 시절부터 나를 ‘용두사미‘형 인간으로 보는 가족들에게도 나란 놈의 진가를 보여줄 때다.
결국 나는 아내에게 따라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런던행 기차를 앞에 두고 아내는 아이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자주 영상통화해. 다음 주 주말에 내려올게.
그렇게 나는 아이와 단둘이 남겨졌다.
유모차를 밀고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도매형 슈퍼마켓을 가는 것이 우리 부자의 하루 일과였다.
그날 점심, 저녁 장사에 쓸 닭 정육을 5킬로 구입하고 1,000원 남짓하는 과일 유아식을 두어 개를 사면 바닥에 달린 바구니가 묵직했다. 집에 돌아와 아이를 핑크퐁 영상 앞에 앉혀놓고 닭고기를 손질하고 컵밥에 쓸 밥을 짓고, 소스를 만들었다. 그리곤 기약없는 점심 주문을 기다리는게 전부였다.
"혹시 공강 시간에 시간 되면 1시간만 우리 집에 있어줄 수 있어?"
"나 저녁에 배달만 빨리 갔다 올게. 기저귀 갈고 아이랑 놀아주고 할 필요는 없어 그냥 집에만 있어주면 돼"
"응 혹시 공강이나 저녁에 잠깐 와서 아르바이트할 생각 있어? 어, 맞아 나랑 둘이 있잖아. 애 두고 나갈 수가 없으니까 너네 도움 좀 받게. 그래도 해야지 여기서 둘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순 없잖아. 그럼 그럼 매일 안 해도 돼. 응 고마워 생각하고 알려줘."
내 컵밥, 양념치킨으로 점심/저녁을 해결하는 손님들, 셰필드의 유학생 동생들은 어설프게 장사하는 나를 돕겠다며 자기들끼리 아예 시간표를 짜서는 아이를 봐주겠다고 찾아왔다. (너무 감사한 사람들)
매일 바뀌는 이모, 삼촌. 어른들로 북적이는 집. 그래서일까 아이에게는 그 흔한 '낯가림' 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어린 너도 눈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한 시간을 빼앗는 게 미안해 마음 맞는 동생들에게 알바를 제안했고, 나를 대신해 고정적으로 배달일을, 주방일을, 육아를 부탁했다. 그렇게 하루 4-5시간 아르바이트비를 챙겨주고 나면 매출보다 지출이 많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아이를 보면서도 장사를 계속 해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집에서 애 보는 가정주부 아빠가 아닌 스스로가 대견했다.
금요일 퇴근 하자마자 기차를 타고 셰필드 집에 내려온 아내는 일요일만 되면 매번 눈물범벅인 채로 택시를 탔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택시를 불러놓고 아이를 품에 안고 놓지 못했다.
1주, 2주... 한 달
장사를 포기할 수 없다는 나와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게 얼마나 지옥 같은지 아냐는 아내
주말만 되면 울음이 터진 아이를 가운데 두고 언성을 높였다.
애를 잘 보는 것도 그렇다고 장사를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자상한 가정주부 아빠이고 싶지 않았다.
'응 또 결국 용두사미가 되었지 않았냐'는 가족의 비아냥이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