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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chroid Mar 19. 2024

희망을 버려요, 그리고 힙냅시다

  공항을 나오면 허겁지겁 흡연장소부터 찾아야 한다. 익스큐즈 미. 웨어 캔 아이 스모크? 이놈의 담배, 죽으면 끊겠지. 젊을 땐 막연하게 마흔쯤 되면 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늙어도 도파민 중독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물조차 맛있게 먹겠다며 제로 콜라를 마시는 녀석들처럼, 나는 늘 심심함과 재미없음을 견디지 못하고 누구보다 쉽게 중독에 빠졌다. 늙는다는 건 그 모든 중독이 서서히 더 나빠진다는 말과 다름없다. 축축한 인도네시아의 밤공기에선 담배 냄새보다 더한 일산화탄소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7시간이나 비행기에 앉아 있으면 머리가 엉망이 된다. 70년이나 살았을 때는 어떻겠는가. 장거리 비행은 대강 모자로 때울 수 있지만 장거리 인생은, 무엇으로도 때워지지 않는다.


  과도한 친절을 베풀며 공항 안에서부터 이미그레이션 포인트 바깥까지 일사천리로 빼준 인도네시아 남자에 이끌려 공항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 자카르타는 여전히 여름이군요. 나는 실없는 농담을 했다. 사뭇 진지한 인도네시아 남자는 엄청난 엑센트로 그래도 겨울엔 이보다 더 시원해진다고 했다. 1월이면 건기가 되는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 달리 적도에 걸쳐 있는 자카르타는 거꾸로 겨울이 우기가 된다. 인도네시아에 발리 빼고는 이렇다 할 관광도시가 없는 이유도 이 이상한 기후 때문이다. 내가 담배를 연신 꺼내 물자 그도 편의점에서 사 온 '에쎄'를 피웠다. 급기야 K 담배. 음식점과 편의점 같은 점포들 옆으로 난 도랑에는 주먹만 한 쥐들이 돌아다녔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모르는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185센티가 넘는 늘씬한 몸매의 JC의 얼굴을 보고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 네. 덕분에 분수에 맞지 않는 비즈니스석에 누워 편하게 왔습니다. 40대로 보이는 JC는 뭐랄까... 거의 다니엘 헤니라고 해도 좋을 인상의 놀라운 미남이었다. 국제수지 균형과 미남미녀의 정의를 필설로 형용하기는 어렵다. 대신 누구나 만나자마자 즉시 알 수 있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미남이 인도네시아에... 가뜩이나 한류 붐이라던데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한국을 진짜 미남의 나라라고 생각하겠네요. JC 입장에선 평생 지겹도록 들었을 칭찬이지만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어떤 '절대미'에 압도당한 나는 호텔로 가는 미니밴에서 난생처음 만난 그의 과거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그의 대답은 전반적으로 신통치 않았는데, 대개의 지나친 미남미녀들이 그러하듯, 그의 인생도 생각했던 대로 돌아가진 않았던 것 같았다.  


  인도네시아는 고유의 문자가 없다. 대신 영어 알파벳을 발음 나는 대로 쓴다.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도 비슷하다. 문자가 없는 나라의 거리를 지나며 알 수 없는 알파벳의 나열을 볼 때마다 새삼 궁금해진다. 문자가 없다는 건 어떤 걸까. 자신의 문자가 없는 상태에서 지적인 전통이 생겨날 수 있을까. 인도네시아는 200년이 넘도록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고, 연이어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날 고층 빌딩이 즐비한 자카르타가 역사의 대부분을 바나나 이코노미로 탕진했다고 해도, 아무도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쓰지 않았다는 건 여전히 놀라운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떠올리기도 전에 그런 대목에서부터 동남아시아를 얕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8차선 대로에서 유턴하는 차들을 위해 몸으로 차량을 막아주는 사람에게 운전자가 돈을 주는 광경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가 문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인도네시아는 수백 개의 종족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20세기에 들어서야 '바하사 인도네시아'라는 인공어를 표준어로 만들었다. 인공적으로 만든 언어이다 보니 시제의 구분도 없고 명사의 인칭 변화 같은 것도 없어 교육수준에 상관없이 빠르게 배울 수 있단다. 그렇게 말도 통하지 않았으면서, 전 세계에서 이슬람 신도가 가장 많은 아시아 국가라니. 우리는 모두 발리의 낭만을 상상하며 자카르타에 왔지만 인도네시아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JC에 의하면 인도네시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착하다'는 거였다. 어느 나라 국민이 그냥 착하다고요? 너무 무성의한 코멘트 같다고 했지만 JC는 물러서지 않았다. 태국도 그렇고 미얀마나 라오스도 그런 거 같아요. 동남아시아 종특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이 사람들 원래 성도 없이 그냥 이름만 있었는데 자기들끼리 성을 만들어 붙인 게 고작 백 년쯤 됐다더라고요. 고집도 센 거 같고 게을러터진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건 제가 만났던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에 비해 너무 순진하고 착해요. 그렇다고 인구가 거의 3억인 나라인데 국민 전체가 착할 수가 있을까요? 심지어 동물의 고기에도 '개체 특성'이 있다는데,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기는 로컬 직원이 뭘 좀 잘못해도 크게 뭐라고 못합니다. 그러니 한국에서처럼 생각하지 마시고 현지 대응이 좀 늦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물론 첫 출장에서부터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친절은 확실히 심상치 않았다. 관광지도 아닌 자카르타에서 우리를 맞이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은 모두 K 드라마에 미쳐 있으며, 자신들의 자식들은 모조리 K 팝만 듣는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우리를 마치 그런 스타 모시듯 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들은 왠지 으쓱한 기분이었다. 그래요. 저는 JC에 비하면 오징어지만, 어쨌든 미남미녀의 나라에서 왔죠.


  오전에 열린 경영회의에서 드디어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왔어요. KR은 출장지 소식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희망퇴직을 받을 건데 조건은 업계 최악이고 다음엔 바로 관계사별로 내보낼 인원을 통지할 거라네요. 잘못은 지들이 해놓고 책임은 직원 보고 지라는 거죠. 임기 내내 뺀질거리며 뭔가 대단한 경영능력이 있는 척하던 회사의 대표는 업계가 다 어렵고 자신에겐 끝내 아무 잘못도 없다고 선언했단다. 누군가 한국 사람의 특징이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한국인은 무엇보다 아주 못돼처먹었죠. 인간 말종들이 드글드글하답니다. 늙은 직원들이 먼저 짐을 싸면 회사의 사정은 나아질까. 모든 구조조정의 딜레마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시니어들은 돈이 필요한데 갈 데가 없으며, 철밥통 회사들은 무능한 시니어들에게 고액 연봉을 주지만 그들은 회사에서 일을 하는 대신 하루 종일 증권과 부동산을 들여다본다. 유능한 젊은이들이 이직을 하고 무능한 동시에 만사가 귀찮은 젊은이들은 소꿉놀이하듯 일한다. 결국 회사는 젊은 무능이 늙은 무능에게 일을 배우는 악순환에 빠진다. 잘못한 놈들이 제일 먼저 나가준다면 우리도 치킨 대학에 가줄 수 있지만, 그놈들이 계속 희희낙락이라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죠. 나는 매가리 없이 맞장구를 쳤다. 자본주의 경제의 사이클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우리는 늘 모두 죄인이 되었다가 은인이 되기도 하고 어쨌든 언젠간 다시 흥청망청하는 날이 온다고 믿는 거니까. 그런데 KR은 하필 왜 이역만리 타국으로 출장을 와 있는 나에게 권고사직 이야기를 전한 걸까.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된 인도네시아 파트너 YW 회장에게 자카르타는 세계에서 가장 재미없는 도시라고 일갈을 날리자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모두 대형 복합상가 건물에 있는 몰에 있고, 자신의 새 건물에도 대형 몰이 입점할 거라고 거꾸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함께 온 젊은 직원들은 거의 손바닥만 한 푸아그라와 알밥 위의 날치알처럼 수북한 캐비아를 먹으며 인도네시아에서는 '엘립스 헤어비타민'과 인도네시아 공장 '폴로'를 사 가야 한다며 웃었다. 호화 와인까지 물경 천만 원이 소요되었을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는 모두 난생처음 온 나라에서 난생처음 누리는 호사에 감격한 채 약간 얼이 빠진 상태가 되었다.


  이틀 전 저녁에 우리에게 수백만 원어치 와인을 먹였던 YW의 회의실에는 멀끔하게 생긴 싱가포르 변호사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안 그래도 모든 일이 모든 면에서 문제가 있었던 차였다. 나는 벌컥 짜증이 났다. 변호사를 불러야 할 사람은 우리인데 왜 로컬에서 변호사를 부른 거죠? 산전수전 다 겪고 갑부가 된 YW는 자신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라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로컬의 한국 파트너들과의 계약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자신의 입이 아닌 싱가포르에서 날아온 변호사들을 통해 설명했다. 아무리 멀리 떠나와도 결국 코리안들이 문제군요. JC를 비롯한 우리와 한국인들은 갑자기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며 언쟁을 벌였다. 한국계 교포 같은 여자 변호사는 한국 아저씨들의 언쟁을 "in broad strokes" 같은 수려한 표현을 써가며 인도네시아 회장님에게 요약해 줬다. 나는 당장 모든 걸 취소하고 돌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결국 아무리 서로를 믿을 수 없더라도 함께 돈을 벌어야만 하는 우리 사우스 코리아의 자낳괴들은 집 안에 기차가 다닌다는 YW 회장을 잘 이용해먹어야 한다는 데 의기투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모든 식당에서 내가 웨어 캔 아이 스모크라고 물으려 할 때마다 직원을 불러 재떨이를 대령시키던 로컬의 실력자 YW가 없다면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배낭여행자들은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을 만나 친구가 된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돈이 얽히지 않은 인간관계에서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서로 스치며 베푸는 호의는 일종의 거리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행자들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평생을 함께 지지고 볶은 가족과 친구도 다 알지 못한다. 엮일수록 힘들어지는 우리들은 역설적으로 엮이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그 힘든 관계들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다. 중늙은이들이 자식뻘 동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회사는 오죽하겠는가. 나는 '슴넷' 여직원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고, 조금 전까지 함께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던 동료를 인사권자에게 악마라고 모함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봤다.


  구조조정의 총대를 멘 SK는 경영지원실장이 되어 계열사를 도는 동안 각 회사의 대표 빌런 자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는 기염을 토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SK요? 한 마디로 개새끼죠. 심지어 다른 경영지원실장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인물이 인사 담당자가 된 회사의 경영이 악화됐을 때, 망치밖에 모르는 경영전략에게 회사의 모든 문제는 못으로 수렴하게 된다. 연초까지 큰 소리를 치던 재무 담당자를 비롯한 소위 '경영진'이라는 녀석들이 이제 와서 한다는 짓거리는 노무사의 자문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었다. 희망퇴직 한 달 전에 신입사원을 뽑고, 말도 안 되는 바이아웃 옵션으로 뭉텅이 돈을 쓸 때 회사의 재무 상황이 이 지경이라는 걸 몰랐다는 거냐는 블라인드 글들이 쏟아졌다. 이런 상황에 사람을 더 기막히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의 성공에는 다 이유가 있고, 실패도 마찬가지라는 식의 필연론자들. 대표가 젊은 나이에 출세를 한 건 그가 어린 시절부터 수재였고, 두뇌회전이 미친 듯이 빠르기 때문이라던 녀석들은 이제 와서 경험이 일천하고, 역량은 그저 참모에 불과한데 너무 중책을 맡았기 때문에 회사가 이렇게 된 거란 하나 마나 한 해석을 내놓았다. 일정 기간 지속할 수 없는 의견은 의견이 아니라 감상에 불과하다. 나는 새삼 의심스러워졌다. 그렇다면 회사가 잘 돌아갈 때 우리는 모두 행복했던 걸까? 유통기한이 유제품이나 다름없는 감상처럼, 우리의 행복은 지속될 수 없는 일종의 쾌락이었고, 그렇게 사는 일은 도파민 중독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잠깐의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의 재미없음도 참지 못하게 된 우리들은 행복의 기억을 사진이나 동영상에 의존해서 만들어 낸다. 아이슬란드 밤하늘의 오로라를 보는 일은 그래서 행복이 아닌 쾌락의 경험이고,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진작에 믿음의 문제가 되었다.  


  가뜩이나 세계적인 교통체증으로 유명한 자카르타에서 길을 잘 모르는 듯한 운전사는 연신 기어 박스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 네비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느라 쉴 새 없이 끼어드는 오토바이를 몇 번이나 들이받을 뻔했다. 인도네시아의 곡예 운전은 공항에서부터 시작이었다. 돈을 주고 산 듯한 경찰 싸이카가 앞에서 요란한 싸이렌을 울리며 길을 터주면 뒤따르는 우리 미니밴이 거의 깻잎 한 장 차이로 옆 차들 사이를 질주하는 식이었다. 사고가 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의 아슬아슬한 운전 때문에 나는 차라리 천천히 가도 된다고 소리를 칠 지경이었다. 자카르타는 서울의 뺨을 치는 교통지옥이라 거리엔 늘상 매연이 가득했다. 출퇴근 시간에 걸리면 건물의 반대편으로 가는 데만 30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막히는 길에서 계속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15분이면 갈 수 있다고 했던 목적지를 한 시간 넘게 가는 동안, 개천 옆 도로에는 조악한 새장에 비둘기를 넣어둔 중년의 남자들이 길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마치 닭처럼 비둘기를 팔겠다는 걸까요? 아뇨. 저도 잘은 모르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비둘기 요리는 한 번도 못 봤어요. 대신 인도네시아에는 비둘기 경주도 있고 관상용으로 비둘기를 팔기도 한다네요. 다시 봐도 놀라운 얼굴의 JC는 스마트폰으로 방금 검색한 정보를 천연덕스럽게 알려줄 정도로 인도네시아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는 인도네시아에 처음 온 게 2년 전이고 그전에는 주로 방콕에서 사업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결정적 대목에서 '아시는 분'이 결정적 도움을 줬다고 했다. 꼭 미남이어서가 아니라 사업을 한다는 사람들의 스토리에는 대개 그런 식으로 '아시는 분'이 반드시 등장한다. 대체 60대의 인도네시아 사업가가 어떻게 JC의 '아시는 분'이 되었다는 건지는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았다. JC는 만사가 그런 식이었다. 우리들이 음료수에 넣는 얼음이 그냥 수돗물 얼음이라면 양치조차 생수로 하라는 이 나라에서 얼음을 넣은 콜라를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물었을 때, 그는 방긋 웃으며 그 잘생긴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식이었다: 저는 괜찮더라고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아시는 분'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문법적으로는 자기가 '아는 분'이고 그분이 '아시는 분'이어야 마땅하거늘, 이 간단한 한국어 경어법도 모르는 한국 사람들이 압존법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무식이 상식이라고 강변할 때마다 움찔해진다. 직원들은 나의 각별한 한국어 사랑이 못마땅한지 뜻만 통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식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남을 미워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말이나 해도 되는 거였다면 사람들은 왜 'I'm 신뢰에요'에 그토록 자지러졌을까? 나는 어쩌다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만도 못한 인생을 살게 된 걸까? 옆자리에 있던 '슴넷' SH가 거들었다. JC 부사장님은 다 얼굴 덕분 아닐까요? 혹시 그 도와줬다는 사람들이 모두 여자 아니에요? 놀랍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방콕에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어떤 젊은 여자 사업가의 도움 때문이었고, 인도네시아까지 흘러와서 YW 같은 방귀 깨나 뀌는 현지 회장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딸들 때문이었다는 거였다. 저 정도 미남자의 삶이란 아무래도 우리와는 많이 다르겠죠? 그건 아주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호주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했지만 JC의 영어는 거의 어학원 수준이었고, 그는 태국말은커녕 인도네시아 말조차 한 마디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마치 미모의 중년 여성들이 '회장님 네트워크'로 '청조경제'를 창출하는 것처럼, 차은우가 오직 얼굴로 성별을 초월해 모든 인간을 압도하는 것처럼, 전 세계에 'K 미남'의 위용을 뽐내왔던 것이다.


  마지막 밤, 우리는 모두 '홍대포차'라는 한국식 술집에 모였다. 자카르타에서 인천으로 가는 항공편은 다른 동남아시아 도시들처럼 밤 비행기라 한국 분들이 전날 한잔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도 이슬람이라고 늦게까지 하는 술집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자카르타가 이슬람 도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유이한 단서는 히잡을 쓴 여자들이 많다는 것과 모든 식당과 술집이 10시면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상하리 만큼 드문 편의점에서조차 술을 팔지 않아서 우리는 밤만 되면 룸서비스를 시켜야 했다. 그런 자카르타에서 유일하게 자정이 넘어서도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은 홍대포차뿐이었다. 출장 내내 우리들은 현지식 체험을 시도했지만 뉴욕타임즈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몇 숟가락만에 나가떨어지곤 했다. 그나마 머슴 입맛인 내가 현지식이 맛있다며 그릇을 비우자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 이야기로 나를 기억할 정도였다. 회사가 상황이 안 좋아져서 구조조정을 한다는데, 저도 이 건이 잘 안되면 그냥 자카르타에서 한식당이나 열까 봐요. 내가 소맥을 들이키며 장탄식을 하자 사람들은 당치 않은 소리라며 맥락 없는 위로를 건넸다. 저도 이제 한물이 아니라 두물쯤 갔으니 그냥 한국을 떠나는 것도 답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싱가포르, 홍콩, 마카오, 방콕, 타이페이 등등 아시아 각지를 떠돌며 만났던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종종 막내인 적이 있을 정도였지만 정작 조국에선 사정이 달랐다. 늙음이 장애가 되는 사우스 코리아. 맙소사, 여기서도 제가 제일 늙은 건가요? 느닷없이 JC가 맞장구를 치며 나섰다. 저도 YW 회장님 건물에서 식당을 할까 하는데 이번 일 끝내고 같이 하나 내달라고 하시죠. 역시 남다른 미남의 호연지기. 젊은 세대 한정이라면 사실 최강 K 푸드는 떡볶이잖아요. 그런데 한국에서 엽기떡볶이 프랜차이즈를 내려면 면접을 마치 시험처럼 몇 차례 통과해야 한다더라고요. 떡볶이 집을 하려면 시험을 봐야 한다니.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그 와중에 한 인도네시아인이 한국에선 치킨 대학, 떡볶이 대학이 좋은 대학이냐고 묻는 바람에 좌중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아무리 멀리 떠나도 여행은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것. 이제 밤도 늦었으니 막잔 하고 슬슬 정리할까요? 새벽 두 시가 넘은 자카르타의 밤은 이제 한국에선 까마득해진 어느 여름밤 같았다. 프로젝트는 갈 길이 구만 리고, 회사는 망삘이고, 대한민국은 되는 일이 없고, 세계는 전쟁 중이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은 건 하나도 없네요. 갑자기 어떤 영화의 명대사가 떠오릅니다. 자, 우리 다 같이, 희망을 버려요. 그리고 힘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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