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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금모자 Aug 20. 2019

혀의 기억

                                  

 나이 들어가면서 어릴 적 먹고 자랐던 음식들이 좋아진다. 

 지금도 잊지 못할 엄마 음식이 있다. 그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봄이 되면 정어리가 알이 차고 맛이 있다. 엄마는 봄에 나온 햇고사리를 냄비 바닥에 깔고 깨끗이 손질한 정어리를 냄비에 수북이 올린 다음 물과 양념장을 넣고 잘박잘박 끓인다. 마지막에 뒤뜰에 지천으로 나있는 박하 잎을 뚝뚝 따 넣고 살짝 끓여 밥상에 올린다. 정어리는 살을 바르지 않고 뼈째 먹어야 맛있다. 씹을 때마다 느껴지던 고소한 정어리의 식감과 혀에 부드럽게 감기는 고사리의 맛, 쌉싸래한 박하향이 어우러져 온 식구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내가 봄을 타느라 밥을 잘 먹지 않으면 엄마는 햇고사리를 넣은 정어리를 지져서 나에게만 따로 주곤 했다. 산뜻한 햇고사리를 넣고 조린 정어리 찌개는 잃었던 입맛도 돌아오게 했다. 

 봄 정어리 철이 지나면 무를 넣은 조기탕을 자주 끓여 주었다. 먼저 무를 썰지 않고 칼로 어슷어슷 삐져 넣은 다음 한소끔 끓인다. 무가 끓기 시작하면 싱싱하고 자잘한 생조기를 2~30마리쯤 넣어서 끓인다. 엄마가 해주던 조기탕은 요즘 매운탕처럼 국물이 많지 않고 조기가 잠길 정도로 잘박잘박하게 끓인 것인데, 무에서 우러난 시원한 맛과 다 익은 생조기의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어릴 적, 헛간에 매달아 시들시들 말려둔 시래기를 푹 삶아 된장 넣고 참기름에 달달 볶아 먹던 시래기나물은 겨울에 주식처럼 먹곤 했다. 신 김치와 두부를 썰어 넣고 끓인 구수한 청국장맛은 요즘 청국장과 비교도 안될 만큼 맛있었다. 

 김장하고 남은 무를 썰어 시들 빼들 말려 고춧잎과 무친 무말랭이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 가면 친구들의 젓가락질에 금방 동이나 버렸다. 

 밥 위에 살짝 쪄서 내놓은 호박잎쌈, 텃밭에서 방금 따온 싱싱한 고추를 노랗게 곰삭은 된장에 찍어 상추에 싸먹던 보리밥. 예전엔 너무 흔해 빠져 먹기도 싫었던 그 음식들이 지금은 너무나도 그립다. 

 엄마는 유난히 장독대에 정성을 들였다. 고추장이나 된장 항아리에 박아 놓은 무를 꺼내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조물조물 무친 장아찌는 찬물에 만 밥과 함께 먹으면 매콤짭짤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 항아리 속에 때로는 깻잎이나 콩잎, 참외나 떫은 감도 들어갔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홀대받던 떫은 감도 쫄깃하면서도 아삭한 맛으로 변해 칼칼한 미각을 돋우어주곤 했다. 그 맛을 재현해내기 위해 직접 장아찌를 담가도 보고, 베란다에 나물들을 말려 음식을 해볼 때도 있지만 예전 엄마가 해주던 그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요즘같이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면 그 여름날 저녁이 떠오른다. 엄마의 팥 칼국수는 별미였다. 엄마는 팥을 삶아 요즘처럼 고운체에 거르지 않았다. 팥의 식감을 살리기 위해 팥을 삶아 절구에 으깬 국물에 칼국수를 풀어 가마솥에 끓여냈다. 김이 펄펄 나는 가마솥에서 퍼 담은 팥 칼국수를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먹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음식의 맛도 맛이지만 그 음식에 얽힌 추억이 그리운지도 모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식구들의 웃음소리. 온 식구가 땀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리고 먹던 그 풍경의 한 조각이 잊혀 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지상에서 더 이상 엄마의 손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엄마가 해주던 음식을 생각할 때마다 잃었던 혀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주방 창밖으로 새가 한 마리 날아간다. 새는 어느덧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우리네 인생도 저렇게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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