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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Mar 17. 2023

꿈에서 아프지 않은 나를 보았다

잠은 남부럽지 않게 잔다. 다른 건 몰라도 잠만은 남부럽지 않게 길게 잔다고 말할 수 있다. 아침에 가야 할 곳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내가 잘 수 있는 최대치의 수면을 취한다. 잠에서 깼다고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 꿈의 여운도 즐기고 이불의 포근함도 최대한 만끽하고 정말 지루해질 때쯤에야 일어난다.


오늘은 잠에서 깬 후 실제로 일어나기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 그건 전부 꿈 때문이라고 해두자. 자꾸만 곱씹게 되는 꿈이었으니까.


꿈에서 나는 아프지 않고 젊고 마르고 예뻤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옷들을 입고 있었다. 머리칼도 지금과 다르게 길게 찰랑이고 있었다. 말간 얼굴. 내가 기억하는 삼십 대 초반의 내 모습이다. 그 모습을 아주 오랜만에 꿈에서 보았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서른대여섯까지는 비슷한 모습으로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청춘이 조금은 유예되었을지도 모른다.


벌써 오 년이나 흘러버렸다는 게 가끔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보통은 믿지만, 이런 꿈이라도 꾸는 날이면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시간을 보내온 건지 혼란스러워진다. 나의 오 년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어디로 가지 않은 것도,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것도 알지만 이렇게 꿈에서 서른 초반의 나를 다시 마주하는 날이면 깊은 생각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그 시간의 흐름에 대하여.


서른셋에 문을 열고 들어와, 서른여덟이 되도록 아직 나가지 못하고 있다. 요새 삼십 대 중반은 그냥 청년이던데, 아파버리면서 자리에 들어앉게 된 것이 못내 속상하다. 청춘을 일찍 떠나보냈다.


종일 꿈에서 보았던 내가 그리웠다. 내가 보고 싶어서 길을 가다가도 멈칫했다. 아프지 않고 젊고 내가 좋아하는 예쁜 옷을 입고 있는 나. 그런 내가 그리웠다.

잠에서 깨서는 그때쯤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웃고 있는 내가 그리웠다. 아프고 난 뒤에는 사진도 거의 찍지 않았다.


재활쌤은 어제, 내가 하고 싶은 건 뭐가 됐든 일단 일상으로의 복귀가 돼야 가능할 거라고 말했다. 일상으로의 복귀가 우선이에요. 지금 우리 그거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자꾸 뭘 하려고 했던 내가 무색해졌다. 그렇지. 나 지금 아직 남들 같은 일상에 가닿지도 못했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하루쯤 서울에 최애 공연을 보러 갔다 올 수 있는 것이다. 고향에 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 약속을 잡고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남들의 일상생활이다. 나는 그 일상에 가닿기까지도 아직 얼마간의 시간이 더 남아있다.


그러다 긴 머리에 까만 재킷을 입고 친척 결혼식 같은 곳에 참석한 나를 꿈에서 만난 것이다. 아, 친척 결혼식에 가는 것도 내가 나아진 후 일상에 포함될 일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갈 길이 오 만리는 되는데 왜 예전 모습이 나와서 날 그립게 해,라고 꿈을 만든 누군가를 탓하고 싶을 만큼 예쁜 모습이었다. 내가 참 좋아했던 내 모습이었다.


시간은 다시 돌릴 수 없다. 그때로 돌아갈 순 없다. 머리를 기르고 살을 빼고 예쁜 옷을 입을 순 있겠지. 하지만 젊어질 순 없다.


그러다 생각을 멈춘다. 그런 것에 사로잡혀서야 앞으로 갈 수 있겠는가.

꿈에서 젊고 예쁜 나를 만났다. 그건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겠지.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되었다.


아프지 않은 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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