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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Mar 18. 2024

다시 여행한다 말할까

홋카이도 4박 5일, 비수기의 맛

나는 여행을 좋아했다. 그리고 오랜 친구들은 모두 나를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기억할 만큼 궁금하면 가보고 해 보고 도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왜 계속 과거형을 사용하냐면 최근 한 5년 동안의 나는 그 무엇보다 여행에 들이는 돈을 아까워했기 때문이다. 한 3년은 코로나 때문에 억지로 묶여있던 것도 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엔데믹을 맞아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이 여행을 참 좋아하네 하고 신기했달까. 그러던 와중에 나는 여행과 관련된 브랜드에서 일하게 되었고 여행자로서의 경험이 진짜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내 인생도 진짜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게 주구장창 다닐 때는 뭐 하나 안 걸리더니.

요이치 다녀오는 길, 눈 구경 실컷 했다

그래도 국내 여행은 야금야금 잘 다녔는데 해외는 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알아보는 게 너무 귀찮고 가서 헤매는 시간이 가기도 전에 피곤했다. 누가 나 좀 데리고 다녀주면 모를까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는 게 이제는 피로감으로 와닿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여행은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거기에 놀라는 것이 큰 기쁨인데 망할 놈의 온라인 세상은 좋은 정보도 알려주지만 일상 속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마주하는 놀라움도 함께 뺏어가 버렸다. 그러던 와중에 친구의 삿포로 티켓팅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나도 그날 밤 바로 티켓을 끊어버렸다. 물론 팬데믹 이전에도 본 적이 없는 가격인 아시아나 왕복 37만 원의 영향도 컸지만 맨날 가던 도쿄가 아닌 홋카이도 정도면 부담 없이 새로 만든 여권 한 번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엔저 땡큐? 2020년에 여권이 만료되고 만들 생각도 안 하다가 작년 연말에 만들었다)

항공권도 싸고, 위스키도 싸고

사실 일본은 가려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나라 중에 하난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건, 다 비슷하고 새로울 게 없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한국에 다 있는 거, 로켓직구로 살 수 있는 거, 뭐 하러 굳이? 내가 여행에 흥미를 잃은 가장 큰 이유다. 나에게 여행은 신문물에 대한 경험과 학습이었던 거다. 그게 지식이든, 물건이든, 알아가는 재미가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는데 너무 많은 플랫폼과 정보들 사이에서 이건 안 볼 수도 없고, 보면 감흥은 떨어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시간이 꽤 길었다. 삿포로 어느 가게의 아이스크림이 맛있다고 블로거가 써놔도 결국 내가 먹어봐야 아는 건데 이미 제공되는 정보들 사이에서 미리 판단하고, 후기가 좋은 곳들은 사람이 많겠거니 하고 또 흥미를 잃어버린다. 아이스크림이 거기서 거기지 하면서.

마트 사시미 퀄리티 보소. 거기가 거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인생에서 점점 ‘굳-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릴 땐 다들 뜯어말려도 ’굳-이‘하고 싶었던 것들이 내 인생을 롤러코스터에 태우더니 이제는 ’굳이?‘하고 아예 놀이기구 대기줄도 서지 않는달까. 불편해지고 마음 볶일 일은 줄어들지만 궁금하고 가슴 뛰는 일들도 함께 줄어든다. 궁금하긴 하지만 ‘굳-이’ 보고 싶은 것들은 점점 줄고, 가슴 뛰는 일이 혹시나 돌고 돌아 나를 두들겨 팰까 봐 ‘굳이?’하고 먼저 마음을 접는다. 그리고 잠깐의 여행에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언어를 통해 습득하는 정보가 많은 나는 모국어처럼 읽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불편함이 불편했다. 내가 ’굳-이‘ 그렇게 좋아하던 여행은 어느새 ’굳이?‘의 영역으로 들어가 즐거움의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려났던 것이다.

선시큰둥 후우와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번 홋카이도 여행은 조금 달랐다. 오타쿠..아니 일본어를 잘하는 친구의 안내로 나는 그저 1차원적으로 보고 느끼고 감탄하는 문맹의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예쁘다, 배고파, 맛있다, 이 단어는 무슨 뜻이야?’ 그저 느끼는 대로 말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친구와 함께 한 여행의 모든 포인트들이 다 내 마음에 쏙 들도록 좋았던 것도 있지만 길을 잘못 들어도, 사람이 많아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회사 안 가고 맛있는 거 사 먹고 신나게 쇼핑하면 어딘들 안 좋겠냐만은 뭔가를 더 알아야 한다는 강박도 없고 친구가 알려주고 내게 주어진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니 4박 5일 내내 그저 행복하고 즐거웠다. 연신 “나 여행 좋아하네.” 외치고 다녔지만 내가 정말 좋았던 건 새로운 풍경과 경험들이 내 시간을 밀고 들어와 그저 느끼기만 해도 되는 1차원의 시간이었다.

1차원의 기쁨과 3차원의 소비랄까

어쩌면 뭔가를 더 알아가야 하고, 알아와야 한다는 강박이 나로부터 여행을 멀어지게 한 것은 아닐까. 여행에 들이는 돈이 아까웠던 건 그만큼 본전을 뽑아오지 못할 것이 두려웠던 것이고, 수많은 정보들을 먼저 접하고 지레 포기해 버린 건 내가 알아간 좋은 것들을 다 누리지 못하고 돌아올 나를 미리 싫어해버린 거다. 아무도 나한테 여행 가서 뭘 얻어오라고 등 떠밀지 않는데 참 이상한 노릇이다. 그냥 나는 욕심이 너무 많아서 다 가지고 싶은데 제대로 못 가지면 속상하니까 “난 원래 그거 안 좋아해.”하는 느낌이다. 말하고 나니 갑자기 너무 쪽팔리는데… 하지만! 이번 홋카이도 여행으로 이 중2병스러운 질환을 다루는 법을 좀 알게 된 것 같다. 몰라도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느끼는 것 자체의 기쁨을 누릴 것.

까막눈이어도 맛있고 행복했어

눈축제는 다 끝나고 라벤더가 피려면 한참 남아 딱히 볼 게 없다고 하는 3월 중순 비수기 홋카이도에서 눈보라를 맞고, 너무 깨끗하고 좋은 호텔을 저렴하게 이용하고, 친구가 찍어둔 맛집에 가서 신나게 때려먹고, 밤에는 편의점을 털었다. 예전에도 일본 여행 가면 늘 하던 것들인데 이번이 유독 즐거웠던 이유는 일부러 뭘 크게 하려고 하지 않아서였다. 가면 좋고, 안 가면 다른 데 가도 되고. 요즘은 특별한 이유 없이 지른 것들의 타율이 좋다. 위에서 말한 중2병처럼 나는 욕심부리느라 생각을 많이 해서 정작 수행을 위한 에너지가 후달리는 편인데 최근 들어 큰 기대 없이 시작한 일들이 오히려 순조롭게 풀리는 경험들을 많이 하고 있다. 이건 여행뿐만 아니라 내 인생에 걸친 숙제이자 하나의 지침 아닐까.

아침저녁으로 들려오던 오타니 소식

내 삶이 순조로워지려면 정말 몸에서 힘을 빼고 길이 열리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정말 자기계발서에 나올 법한 말을 내가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다 안다고 시건방을 떨 것도 없다. 동네마다 다 있는 이치란 라멘을 처음 먹으며 감탄하던 나는 과거에 있고, 오타루역 앞 라멘 맛집에서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 한 잔을 해치우는 나는 지금에 있으니까.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 너무 대도시는 싫고 적당히 이국적인 풍경을 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홋카이도 추천이다. 나도 너무 지역의 일부를 간 거라 단언하긴 어렵지만 적당히 한적해서 좋았다. 여러 계절, 시간을 두고 이 섬을 구석구석 찾아다녀보고 싶어졌다. 봄, 여름동안 일 열심히 하고 가을에 또 어딘가 기웃거려 봐야지.

삿포로TV타워였나?

앞으로 내가 다니게 될 여행이 궁금해졌다. 홋카이도로 시동을 걸었으니 이제 틈만 나면 구글맵으로 세계여행 한 번 하고 티켓을 알아보는 일이 잦아지게 될 것 같다. 놀러 가고 싶은데 동반이 필요한 분들,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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