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사랑의 기록
재수시절, 첫 모의고사에서 58명 중에 56등쯤 하고 ‘아 난 이렇게 인생이 망하는구나’하고 넋이 나가 있던 때였다. 고3 때 공부는 열심히 안 했어도 그래도 바닥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서울대 가려고 삼수하는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완전 두드려 맞은 거다. 그러던 차에 학원 담임 선생님이 학부모 면담을 하신다네. 가뜩이나 수능 망하고 겨우내 집에서 눈칫밥 신세여서 잔뜩 쫄아있었는데 면담을 마치고 온 엄마는 생각보다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너 열심히 하면 그래도 어디 대학교는 간다더라, 너 수학이 그게 뭐니 등등 격려든 욕이든 뭔가 들어야 하는데… 너무 말이 없으니 무서워서 맨날 자습하고 집에 늦게 들어갔다.
학원은 말이 학원이지 교도소랑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눈물 닦으면 다 에피소드라는 말처럼 지금은 다 추억이 되었지만. 담임 선생님의 재가 없이는 학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고 심지어 저녁 때는 아예 셔터가 내려갔다. 사감 선생님이 몽둥이를 들고 문 앞을 지켰고, 밥은 노란 용기에 담긴 배달 도시락으로, 이미 성인의 체구를 가졌으나 입시에 실패해 어른도, 학생도 아닌 존재들이 좁은 교실에 콩나물시루처럼 가득 차 있었다. 아침 8시에 가서 그 좁은 교실에 갇혀있다가 밤 10시에 나오는 거다. 비싼 강남 바닥의 엄청 좁고 높기만 한 건물에 콩나물…아니 패배자..아니 수험생들이 그득해서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힘들었다. 고3 생활의 연장이었으니 말이지 지금 하라고 하면 이틀 만에 도망 나왔을 거다. 아무튼 그 안에서도 뭐 연애도 하고 할 건 다 했지만 캠퍼스 생활을 누리는 ‘동년배’들과는 확실히 다른, 대학 입시라는 하나의 목적 아래 모든 시간들이 흘러가는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 교실마다 갑자기 완강기라는 것이 설치되었다. 난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단어였는데 무슨 재난시에 그걸 잡고 벽을 타고 내려가라나.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학원이 또 쓸데없는 데 돈을 쓰는구먼 했다. 다행히 내가 학원에 다니는 동안 그 완강기를 사용할 만한 재난은 없었고 이제 재수시절은 미화된 버전으로만 남아있을 만큼 아주 오래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완강기라는 단어만 이상할 만큼 선명한 채로. 그냥 스무 살 먹어서 내가 처음 들어본 단어가 있다는 자체가 너무 신기해서 여전히 그것의 기능은 잘 모르고 단어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 엄마와 재수학원 때 얘기를 하는데 그 완강기 설치를 주장한 사람이 우리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도대체 엄마가 왜?
알고 보니 첫 면담을 하러 학원에 가본 엄마는 정작 내 성적이나 공부에 대한 얘기 말고 “근데 여기는 불나면 애들이 어디로 도망가나요?” 같은 질문을 해서 학원 선생님들을 무지 곤란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정작 본인 딸 성적이 지금 불타고 있어서 화재진압을 해야 할 판인데. 아니 뭐 충분히 중요하고 유의미한 질문이긴 한데 우리 엄마가 저런 소리를 왜 했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오히려 엄마는 쿨하게 대답했다. “건물이 닭장 같은데 불나면 계단은 좁고 우르르 내려오지도 못할 거 같고 그래서 막 따졌지” 너무 명료한 엄마의 말에 오히려 내가 할 말을 잊었다. 맞지. 맞는 말이지. 그렇다고 우리 엄마가 그렇게 정의캐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했을까.
그리고 그때의 담임은 “얘는 어디 어디 정도 갈 겁니다”라고 이미 예언을 해놓았고 나는 정확하게 그 대학 그 학부에 들어갔다. 본게임이 한참 남은 수험생활 초기에 너무 단호한 담임의 얘기에 엄마는 분명히 실망했을 수도 있는데 별 얘기가 없었다. 내가 학교에 입학하고 한참을 지나서까지 저 얘기를 안 하다가 몇 년 전인가 스치듯이 얘기를 하는 거다. 엄마는 그럼 대충 다 예상하고 알고 있었던 거네. 난 고3 때 공부 안 한 업보로 재수 때 쎄빠지게 해서 대학 간 줄 알았는데 나의 배치표는 이미 대충 정해져 있던 거였다. 지나고 보니 나는 담임의 예언도 신기했지만 그걸 끝끝내 나에게 말하지 않았던, 그리고 진짜 그 학교에 갔을 때 무지 기뻐하던 엄마가 더 신기했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가 점점 한 인간으로 보인다. 존경과 사랑의 마음과는 별개로 한 사람의 인생이 더 깊고 크게 다가온달까. 심지어 나와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짙게 엮여있는 사람이니 다가오는 정도가 4D 아이맥스다. 어릴 때는 엄마가 너무 무서웠다. 많은 엄마들이 딸에게 그렇듯 엄마는 나에게 본인의 인생을 투영했고 나는 아예 실망시킨 것도 아니고 아예 충족시키지도 못해서 우리는 늘 불편하고 서로 속상해하는 관계였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 이런저런 감정의 차포를 다 떼고 보니 엄마는 참 선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들이 모호하게 느낄만한 것 없이, 자기 마음과 생각에 되게 솔직했던 사람.
사랑하는 방식도 선명했다. 어린 내가 해석을 못해서 그렇지. 공부만 잘하길 바라는 줄 알았는데 그 누구보다도 나의 안녕을 바랐던 사람. 그리고 내 새끼, 남의 새끼 크게 다르게 생각할 수가 없는 엄청 큰 품을 가진 사람. 그리고 본인의 인생에 대한 열망도 뜨거웠던 사람. 막상 내가 다른 학교에 들어갔어도 처음엔 뭐라 하다가 또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았을 거다. 근데 그때 담임이 찍어준 학교, 즉 내가 들어간 학교는 늘 학교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던 엄마의 인생을 한 방에 보상해 주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분명히 내가 나온 학교보다 좋은 학교가 훨씬 많은데도 엄마는 한 번도 네가 어디 어디 갔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모든 아이들의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할 만큼 통도 크고 마음도 큰 사람인 엄마는 나를 들여다보는 마음은 너무 나노현미경 같아서 우리는 진짜 꽤 오래 불편했다. 밖에서 사람들 눈치 많이 보고 소심한 나는 막상 엄마가 걱정할 만한, 나에게 닥친 일들은 말없이 혼자 뚝뚝 부러뜨려 가며 고집스러웠다. 서로가 늘 ‘왜 저러지’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 같다. 30대 후반에 들어서야 엄마와의 보정값을 어느 정도 맞추게 된 나는 그래서 이 시간이 더 애틋하다. 엄마가 좀 더 젊었을 때였으면 좋았겠지만 우리 둘 다 기력이 좋아서 아무리 맞추려고 애써도 안되었을 거다. 앞으로 우리가 보낼 시간이 어떤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만 같으면 딱 좋겠다. 어쩌면 내가 고령의 캥거루를 자처하며 도로 집에 들어온 것도 하느님이 ‘야 너네 둘이 그만 싸우고 이제 퀄리티 타임 좀 보내라’하는 의도 아니었을까.
아직도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 우리 엄마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길,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많길 바란다. 엄마가 인생을 걸고 나에게 최선을 다해준 것처럼. 우리가 건강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더 많게 되길 바라고 또 바란다.
엄마 사랑해.
+ 아빠도 사랑해
++ 근데 한 번에 두 개는 못쓰겠어서…아빠는 내년 어버이날에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