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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Dec 03. 2024

내가 박정민은 아니지만

1년을 쉰다길래

나는 가끔 내가 배우 같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겠지만. 일단 한 번 들어봐요.


직장인과 배우, 뭔가 너무 극단에 있는 직업의 형태 같지만 직장이라는 곳을 잠시 머무르는 곳, 또는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꽤 설득력이 생긴다. 사람마다 캐스팅되어 있는 작품이 다른 거다. 누군가는 20년 넘게 하는 전원일기의 출연진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독립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12부작 넷플릭스 시리즈에 나오기도 하고. 누군가가 나를 캐스팅해주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언젠가 이 작품은 끝이 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직접 프로필을 돌리고 오디션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오디션이 필요 없는 사람도 있다. 주변의 추천으로 캐스팅이 되는 사람도 있다. 회사랑 똑같지 않은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면 '그럼 지금 나의 포지션은 어떤 배우랑 가장 비슷할까'까지 흘러간다. 일단 근속기간 측면에서 오래 방영하는 프로그램은 탈락이다. 그리고 꾸준히 대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립영화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가끔 급하면 감독 대신 연출도 하고 그런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끝나면 다음 작품이 줄줄이 잡혀있는 것도 아니다. 적당히 발품도 팔아야 하고, 적당히 있어 보이는 척도 해야 한다. 이쯤 되면 강동원, 전지현은 아니라는 굉장히 당연하고 싱거운 결론이 나온다. 그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랬으면 내가 브런치에 이런 걸 안 쓰고 있겠지.


좀 더 가보자. 작품 형태의 일관성이 없어서 그렇지 그래도 무언가를 꾸준히 사부작사부작 해온 사람이다. 업계에서 유명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호되게 욕을 먹는 정도도 아니고, 필요한 곳에 소개로 툭 던져주기에 그렇게 낯 뜨겁게 할 사람이 아닌 정도의 신뢰도는 갖고 있다. 빼어난 미모나 매력으로 승부를 보는 주연급은 확실히 아닌 것 같고, 세간의 말들로 따져보자면 개성 있는 조연에 가깝겠다. 15년 동안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다 보니 어딘가 나오면 '어, 나 저 사람 다른 데서 본 적 있는데'하는 정도랄까. 하지만 이름은 모르는 그 정도 비중의 배우. 그래도 그 장면에서 필요한 역할 하나 정도는 확 쳐주고 빠지는 그런 사람.


보통 여기까지 오면 그런 사람이 꾸준히 매체에 얼굴을 비추고 결국 비중 있는 조연으로 꾸준히 나오다가 우연히 만난 작품으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는 라미란 같은 전개가 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만큼 이쪽이 사는 세상도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들은 생각보다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16년 차 배우는 고뇌에 빠진다. 열심히 하다 보면 다가올 것 같았던 반짝이는 날들은 쉽게 오지 않고, 여태껏 배운 도둑질은 이거 하나뿐이다. 조금 더 해보는 방법도 있고, 생계를 위해 연기학원 강사 알바를 할 수도 있고, 아예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들으면 들을수록 직장인과 똑같지 않은가.


이 글에 끌어들이기에 박정민은 너무 연기도 잘하고 여기저기서 불러주는 걸 마다해야 하는 슈퍼스타라 조금 미안하지만 반복되는 작업 속에서 같은 표정을 발견하고, 쓸 이야기가 없어서 좀 쉬겠다는 그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나는 번아웃 뭐 그런 건 아니고 iOS 업데이트 정도가 적절해 보인다. 아등바등하며 쌓아온 시간에 대한 허무함도 아니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아니니까. 지금까지 했던 것들이랑 좀 다른 것들을 해야 아니면 뭔가를 안 해야 지난 15년을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보일 것 같달까. 아예 다른 걸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는 것도 콜이다. 뭐든 선명해지기만 한다면.


어차피 슈퍼스타의 삶은 이미 글러먹은 것을 알기 때문에 개성 있는 조연은 꾸준히 많은 작품을 해야 한다. 캐릭터에 맞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계속 쓰임을 받겠지. 나는 그런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횟집사장으로 나오고, 저기서는 주인공 친구로 나오고, 길게 보지는 못해도 따박따박 정확한 딕션으로 그 컷은 다 잡아먹는 그런 사람. 강말금, 이봉련, 공민정 배우 이런 사람들의 매체 초창기 모습들이 떠오른다. 생각해 보니 나는 내가 본 연극이나 독립영화에 나왔던 연기 잘하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매체에 나올 때 너무 좋았다. 뭔가 성공과 성장의 서사보다는 결국 누군가가 그들을 알아봐 주었다는 게 좋았던 듯하다.


이쪽이 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나 또한 나도 모르게 내 처지를 알고, 위치를 알고, 기대를 하고, 마음을 접고,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사실 그게 맞다. 나이가 들어 자기의 분수를 잘 모르는 사람은 더이상 귀엽지 않으니까. 그건 많이 봐줘서 서른에 끝났다. 이 시간도 분명히 앞으로 다가올 다른 어떤 시간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그리고 좋은 일만 가득한 삶이라고 느껴진다면 누가 내 밥에 몰래 약 탄 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니까. 나도 이제 이걸 알 만큼은 굴러먹었으니 다음 선택은 조금 더 세련된 선택이면 좋겠다. 막 화려하고 멋지지 않아도 되고 좀 뭉툭해도 약간의 소년미가 있는 그런 선택. 옆에서 봤을 때, “어우 야 쟤 저거 괜찮겠니?” 싶은데 “그래도 어떻게 꾸역꾸역 밥벌이는 하네”하게 되는 그런 선택.


익숙하고 편안한 지루함과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지독하게 널을 뛰는, 이 지랄맞은 어른의 삶 속에서 그래도 좀 산뜻한 선택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나이들고 싶다. 그러려면 나도 지금 좀 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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