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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Jun 14. 2023

패션에서 패션보다 중요한 것

편리함은 아름다움에 뒤처지지 않는 가치

패션 쪽에서 일하면서 가장 재밌고 생경한 건 '유행'의 개념이다. 둔감한 소비자로서 인지하게 되는 유행이란 패션 시장에서 유행이 흘러가는 순서 중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사람들이 '나도 한번 시도해 볼까?'라고 생각하는 스타일이란 이미 패션쇼와 디자이너브랜드 시장에서 넘쳐흐른 뒤의 잔여물에 가깝다. 그렇게 흘러내린 유행은 몇 년을 숨이 끊어질 때까지 부유하다가 다시 떠내려온 다음 유행의 부유물에 밀려난다.


소비자는 패션 시장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뿌리이지만 이들이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시장의 주축이 시장을 주도하지는 못하는 이상한 아이러니 속에서, 몇 가지 유행의 흐름은 그 소비자의 단호한 취향 덕분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기도 한다. 유행과 상관없이 지켜지는 이 시대의 취향은 단언컨대 편리함이다.



유행에서 클래식이 된, 운동화 & 와이드팬츠


운동화와 와이드팬츠는 이 유행의 흐름 중에서도 좀 신기한 트렌드였다.  유행의 최상위권에서는 이 두 가지를 이미 한참 전에 밀어내려 하는데 돌덩이처럼 버티고 밀리지 않는 유일한 트렌드랄까. 패션쇼에서는 매 시즌마다 꾸준히 다양한 형태의 하이힐이 나타났고 수많은 바지가 와이드팬츠를 대체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운동화를 신고 와이드팬츠를 입는다. 아직 모두가 입고 있기에 유행에 뒤처진 느낌도 없다. 트렌드로 시작해 어느새 클래식이 되었다.


국내 디자이너 슈즈, 특히 수제화의 수명이 언제 딱 끊어졌는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정확한 기점은 코로나였다. 코로나 거리 두기가 시작되면서 관리하기 어려운 가죽으로 만든 불편한 구두를 비싼 값에 사 신는 사람은 사라졌다. 인조가죽 구두가 일부 시장을 대체했지만 믹스매치, 놈코어 등의 모든 트렌드에서 가장 주력으로 활용한 신발은 운동화였다. 구두가 나름의 지분을 차지하던 세상이 어느 날 눈떠보니 전부 운동화로 가득한 세상이 된 것이다. 알고 지냈던 디자이너슈즈 브랜드들은 몇 년간은 희망을 가지고 고군분투했지만, 지금은 모두 가방으로 사업을 바꾸거나 폐점했다.


와이드팬츠 역시 비슷하다. 바이커쇼츠, 테니스스커트 등 다양한 하의가 몇 년간 런웨이와 패션시장을 점유하려 했지만 와이드팬츠 정도의 대중성을 가지지는 못했다. 한때 스키니진이 가졌던 영향력을 와이드팬츠가 그대로 빼앗은 뒤로는 그 어떤 하의도, 와이드팬츠보다 불편한 옷은 그만큼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의 세대교체, 브래지어


크게 전복된 유행의 측면에서 봤을 때 속옷만큼 변화가 컸던 사례도 없을 것이다. 30대 여성 기준으로 20대 초반까지는 와이어 브래지어의 시대였다. 레이스와 와이어가 반드시 달려있는 브래지어 외에 다른 속옷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 그러다 20대 후반부터 브라렛이라는 새로운 형태가 나타나더니 노와이어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속옷의 세대교체는 구두에서 운동화로 바뀌는 것보다도 더 거세고 급박했는데, 예상하기로 와이어 속옷의 불편한 정도가 구두의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이었으리라. 오랜만에 와이어 브라를 착용해 보면 대체 이걸 어떻게 착용하고 생활을 했을까 싶은 수준이다. 코르셋과 다를 바 없는, 뼈대 있는 불편함이었다.


지금은 브라렛도 불편하다는 의견이 늘어나며 노브라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한번 와이어 브라에서 노와이어로 넘어가면 되돌아갈 수 없듯, 노브라로 한번 넘어오면 더 이상 브라렛조차 입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해서 이 불편을 겪어야 하느냐는 의문이 한번 생기면 더 이상 불편을 감수할 이유가 없어진다. 편하다는 브라렛을 몇 년째 입던 나도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이 너무 답답해졌고, 벗고 나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는 다시 그 코르셋 안에 몸을 넣고 싶지 않아졌다. 그 코르셋이 아무리 이전보다 편해졌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수영복에 달린 브라 패드에 대한 고민이었다. 한국 수영복은 거의 모든 제품에 브라패드가 달려서 나온다. 가슴이 티 나지 않게 하기도 하지만, 그 패드는 가슴이 좀 더 볼륨감 있어 보이게 만들어주는 역할도 해준다. 해외 브랜드의 경우는 거의 모두, 그 패드가 기본적으로 없다. 나이키 등의 모든 유명 브랜드의 여성 수영복은 패드를 걸 수 있는 고리조차 없는 그저 천 쪼가리다. 이런 수영복을 구입해서 한국 사람들은 모두 실리콘 패드를 가슴에 얹어 입는다. 이유는 대부분, 패드 없이 입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였다.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난 수영을 시작할 때부터 그 패드가 너무 싫었다. 가슴 두 짝을 떼어 둔 것 같은 손바닥만 한 실리콘 판때기를 가슴에 얹은 뒤 안 그래도 입기 힘든 수영복을 그 위에 맞춰 입는 건 생각만 해도 불편해 보였다. 수영 강습을 받는데 볼륨감이 필요한가 생각해 보니 1초 만에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키는 두 겹 수영복이라 티도 안 난다. 그런데 그 어떤 수영 카페에서도 패드 없이 수영복을 입어도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는 사람은 없었다. 도움 받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첫 수영 강습생으로서, 창피를 당할 두려움과 편하고 싶은 마음이 한참을 오락가락했다. 집에서 여러 번 물을 끼얹어본 뒤 떨면서 첫 강습을 가슴 패드 없이 받은 뒤, 10년간 수영을 하며 한 번도 패드를 사용해 본 적이 없다.



편리함은 아름다움에 뒤처지지 않는 가치


이 모든 변화의 첫 번째는 통념적인 미적 기준의 탈피였다. 탈피한 뒤에야 미적 기준이 바뀐다. 하이힐, 스키니진, 와이어 브라로 만들어지는 고전적인 미감, 콜라병 같은 곡선의 몸매라는 미적 기준은 이제 올드해졌다. 노래방 간판, 트랜스포머 여자친구 같은 곳에서나 그런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그려낸다.


지금, 올해 패션계의 아름다움은 젠더리스한 것이다. 지금은 여성 모델의 납작한 가슴이 힙한 것이고, 스틸레토가 아닌 청키한 굽의 부츠가 아름답다. 와이어와 하이힐로 추켜올린 볼륨감을 아름답게 만들었던 것도 그 시대의 패션이고, 그걸 고루한 것으로 바꾼 것도 지금의 패션이다. 이 현상이 계속 이어지고 발전하는 데에는 더 이상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의지가 담겨있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조금씩 더 편해지기 위해서는 그 의지를 언제나 잊지 않도록 불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은 산업이 아니다. 산업의 소비자인 여성이 추구하는 것이다. 편리함은 아름다움에 뒤처지지 않는 가치임을, 우리의 몸은 아름답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는 것은 유행을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다. 내가 패션 MD로 일하고 있는 시대가 하이힐과 와이어 브라의 시대가 아니라는 점에, 조용히 자주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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