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아 Aug 01. 2022

각본 없는 드라마

13. 빙의하는 듯한 통역

오늘은 통역사로 경험한 아주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기록해볼까 한다. 정답이 있으나 없기도 한 현장에서의 에피소드로 여겨주기를 바란다.




다양한 비즈니스 분야 중에서도 최종 소비자를 대상으로 생산•판매하는 제품의 제조사들은 매 시즌 혹은 매 단위 기간마다 소비자의 심리 및 시장조사를 위한 연구/리서치를 진행한다. 물론 필자도 통번역사로 이 분야의 프로젝트에 다수 참여해보지 않았더라면 쉽사리 접하거나 알 수 없었을 일이다. 국내 굴지의 전자제품 제조사들이 그 일환으로 글로벌 시장에 대한 주기적인 마켓 리서치를 진행할 때 동시 통역사로 투입이 되곤 한다. 두 원어민 전문가(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통역 혹은 인터뷰 참관의 존재를 구두로 안내받지만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없는 상황서 이루어지는 장시간의 자유로운 대화를 동시통역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장시간의 자유로운 대화이다. 물론 최초에 계획된 인터뷰의 방향성과 주제의 틀은 주어져있다. 하지만 대화가 긴 시간 이어질수록 그 틀이 얼마나 지켜질 수 있을까. 당연히 대화가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깊이의 전문지식이 대화 중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사전에 예상 가능한 최대한의 범위를 커버할 수 있도록 자료를 모으고 또 공부해야만 한다. 그렇게 문제없이 인터뷰를 한건 한건 쳐내듯 통역을 해나가던 중 클라이언트로부터 재밌는 피드백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통역사님은 통역할 때 발화자에 빙의하시네요!!!"

"아... 네?!"

"인터뷰이가 바뀔 때마다 통역사님 톤도 덩달아 달라져요. 하하하!"


그 당시에는 너무 놀라고 부끄러워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것 같다. 장시간 훈련하고 해가 거듭된 현장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안정적이면서도 잘 들리는 톤을 개발했고 또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기에... 그런데 이런 종류의 피드백이 처음이기도 했고 나의 통역 수행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빙의하는 듯한 통역은 연구 자체에 또 다른 형태로 도움이 되었고, 그에 대한 클라이언트의 만족도가 높아 최근까지도 지속적으로 동일한 역할로 함께 일하고 있다. (사실 하루 3-4건 이상의 난도 높은 동시통역을 통역사 1인이 수행하는 상황 또한 일반적이지 않은 꽤 극한 작업 현장이다. 통역사도 사람이니까...)


이런 경험을 통해 지금은 아나운서와 같은 정리된 톤이 필요한 통역 현장도 있고, (정리된 톤도 다양할 수 있고 자리에 따라 톤&매너를 달리 하지만) 발화자의 의도와 감정을 어느 정도 반영하여 전달할 수 있어야 하는 통역 현장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연습과 훈련이 가능한 영역과 그것을 초월해야 하는 영역이 있달까.



매거진의 이전글 따로 또 같이 일하는 프리랜서 통번역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