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통역사로 경험한 아주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기록해볼까 한다. 정답이 있으나 없기도 한 현장에서의 에피소드로 여겨주기를 바란다.
다양한 비즈니스 분야 중에서도 최종 소비자를 대상으로 생산•판매하는 제품의 제조사들은 매 시즌 혹은 매 단위 기간마다 소비자의 심리 및 시장조사를 위한 연구/리서치를 진행한다. 물론 필자도 통번역사로 이 분야의 프로젝트에 다수 참여해보지 않았더라면 쉽사리 접하거나 알 수 없었을 일이다. 국내 굴지의 전자제품 제조사들이 그 일환으로 글로벌 시장에 대한 주기적인 마켓 리서치를 진행할 때 동시 통역사로 투입이 되곤 한다. 두 원어민 전문가(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통역 혹은 인터뷰 참관의 존재를 구두로 안내받지만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없는 상황서 이루어지는 장시간의 자유로운 대화를 동시통역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장시간의 자유로운 대화이다. 물론 최초에 계획된 인터뷰의 방향성과 주제의 틀은 주어져있다. 하지만 대화가 긴 시간 이어질수록 그 틀이 얼마나 지켜질 수 있을까. 당연히 대화가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깊이의 전문지식이 대화 중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사전에 예상 가능한 최대한의 범위를 커버할 수 있도록 자료를 모으고 또 공부해야만 한다. 그렇게 문제없이 인터뷰를 한건 한건 쳐내듯 통역을 해나가던 중 클라이언트로부터 재밌는 피드백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통역사님은 통역할 때 발화자에 빙의하시네요!!!"
"아... 네?!"
"인터뷰이가 바뀔 때마다 통역사님 톤도 덩달아 달라져요. 하하하!"
그 당시에는 너무 놀라고 부끄러워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것 같다. 장시간 훈련하고 해가 거듭된 현장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안정적이면서도 잘 들리는 톤을 개발했고 또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기에... 그런데 이런 종류의 피드백이 처음이기도 했고 나의 통역 수행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빙의하는 듯한 통역은 연구 자체에 또 다른 형태로 도움이 되었고, 그에 대한 클라이언트의 만족도가 높아 최근까지도 지속적으로 동일한 역할로 함께 일하고 있다. (사실 하루 3-4건 이상의 난도 높은 동시통역을 통역사 1인이 수행하는 상황 또한 일반적이지 않은 꽤 극한 작업 현장이다. 통역사도 사람이니까...)
이런 경험을 통해 지금은 아나운서와 같은 정리된 톤이 필요한 통역 현장도 있고, (정리된 톤도 다양할 수 있고 자리에 따라 톤&매너를 달리 하지만) 발화자의 의도와 감정을 어느 정도 반영하여 전달할 수 있어야 하는 통역 현장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연습과 훈련이 가능한 영역과 그것을 초월해야 하는 영역이 있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