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영웅(英雄) 김성집
"36년 식민지를 끝내고 우리 국호와 국기를 세우고
올림픽에 설 수 있다는 자체로 눈물이 났다."
역도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장미란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확정 짓고 두 손 모아 기도하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여기, 역도뿐만 아니라 김연아, 박지성, 등 엘리트 선수들이 세계 무대로 나아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공헌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대한민국 올림픽 최초로 동메달을 따낸 1세대 역도인 故 김성집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역도에 입문한 어린 소년
김성집은 15세에 처음 역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가진 재능과 더불어 역도에 쏟는 열정도 굉장히 높았습니다. 다음은 대한체육회에서 발간한 도서 『영원한 올림피언 김성집』에서 당시 훈련상황을 회고한 내용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서 시멘트로 만든 역기를 들어 올리며 개인 운동을 하고서야 도장으로 나갔습니다. 성과는 곧 나타났습니다. 초보자 과정에서 불과 6개월 만에 숙련자 과정을 뛰어넘어 선수과정으로 진입했습니다. 드디어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베를린 올림픽 출전의 기회
그는 역도를 시작한 지 2년 반 만에 총계 650파운드를 기록하며 국내 챔피언 자리에 올랐습니다. ‘조선이 낳은 소년 역사’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기량이 향상되었습니다. 평소에도 성실하기로 유명한 그는 새벽 훈련을 하루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올림픽 출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8세가 되던 해 ‘제11회 세계 올림픽 역기 예선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온 것입니다. 이 대회의 우승자는 베를린 올림픽에 나가 세계와 겨룰 수 있었습니다.
김성집은 이미 국내 대회를 휩쓸며, 예선전에 나가기만 해도 우승이 확정될 만큼 기록이 높았습니다. 그는 예선대회 출전을 위해 죽기 살기로 훈련했습니다. 괴력을 가진 소년이라는 소문을 듣고 일본 역도 관계자 그리고 일반 시민들까지 모여들었습니다. 조선에서 세운 기록을 믿지 못해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제 몰려드는 사람들 앞에서 높은 중량을 들어 올렸고, 사실을 확인한 일본 역도계의 충격은 굉장히 컸습니다.
이때 일본 선수가 조선 선수에게 패배하면 안 된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비열한 꾀를 내었습니다. 바로 시합 직전, 역도대회 출전 금지를 시킨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대표 김성집은 만 18세가 되지 않은 미성년자이다. 따라서 공식 선발 전에 출전할 수 없다. ’ 다만 주위 평판을 의식했는지 '번외경기에만 출전을 허용한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압도적인 기록차로 우승할 것 같으니, 공식 무게가 전혀 인정되지 않는 번외 경기만을 허락한 것이죠. 그대로 예선대회가 치러졌습니다. 같은 체급 우승자인 일본 선수는 총계 262.5kg을 들었고 번외경기에 나간 김성집은 317.5kg을 들어 올렸습니다. 합계가 무려 55kg 차이가 나는 기록이었습니다.
대회 후 일본 역도연맹은 다시 한번 충격적인 발표를 합니다. ‘올림픽 출전 포기’를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승한 일본 선수의 기량이 한참 떨어지고, 김성집과의 비교가 무색할 만큼 실력차가 컸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조선 선수도 일본 선수 모두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당한 편법에 김성집은 좌절했지만, 이를 계기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꿈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대한민국 최초 올림픽 메달리스트
김성집은 올림픽 무대의 꿈을 위해 무거운 쇳덩이를 밤 낮 없이 들며 기량을 갈고 닦았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12년이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3번의 올림픽이 무산되었기 때문입니다.(1937년 일본 중일(中日)전쟁 베를린올림픽,1944년 2차 세계대전 1940년 도쿄올림픽, 1944년 런던올림픽 취소) 기다림 끝에 런던 올림픽이 부활한것이죠.1948년, 30살이 된 김성집의 가슴은 다시금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쟁 상황에서도 바벨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훈련에 집중했습니다. 도서 『영원한 올림피언 김성집』에서 그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수 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나는 김성집 바로 옆집에 사는 임동수(농구 코치)이다. 매일 아침 잠을 설쳐 만나는 사람들에게 칭찬 반, 불만 반으로 투덜거렸다. 새벽마다 앞마당에서 김성집이 내는 역기소리가 쿵, 쿵, 덜거덕하고 당장 너머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김성집은 ‘덜거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노력한만큼 하루가 다르게 기록이 향상되며, 1948년 올림픽 선발전에서 빼어난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선발전에서 당당히 선발된 후 다음 목표는 영국 런던을 향했습니다. 올림픽 사상 최초로 태극기와 ‘KOREA'란 국호로 참가한 출전이었습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김성집 선수는 역도 미들급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당시 허리 부상이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임원들에게 걱정을 보태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와 갑작스러운 허리 부상. 그는 과연 잘 해낼수 있었을까요?
드디어 시합 당일, 함께 나온 라이벌들과는 첫시기 무게에서부터 기록 차이가 났습니다. 1,2등과 대략 10~15kg정도의 차이였습니다. 임원진은 금메달이 힘들다는 판단을 하고 동메달을 목표로 계획을 수정합니다. 할 수 없는 무게로 무리하게 높이면 기록이 0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성집은 인상112.5kg, 용상145kg 추상122.5kg 합계 380kg을 기록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후 첫 올림픽 메달(동메달)을 획득한것입니다. 전쟁으로 3차례의 올림픽 기회를 잃고, 12년만의 한을 푼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김성집은 시상대 위에서 올림픽 출전 기회를 막아서던 일본인들의 얼굴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송해주던 시민들의 모습이 차례로 눈앞을 스쳐갔다고 전합니다.
마지막 투혼
그렇게 시간이 지나 1958년 5월. 당시 40세인 김성집은 도쿄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선수로서의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이후 행정가로서 체육계의 살림을 보살피고, 태릉선수촌의 촌장으로 18년을 역임하였습니다. 김성집은 평생을 스포츠 선수후배들을 양성하고 헌신하며 2016년 향년 97세의 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현재는 그 공을 기리며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저의 중학교 시절 역도대회에서 종종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위대한 올림픽 영웅인 김성집 선배님께 존경을 표하며 포스팅 마치겠습니다.
‘… 그동안 가슴 뿌듯하게 기쁘고 감격스런 순간도 많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애를 태우고 탄식하며 괴로워했던 나날들도 많았다. (중략) 춥고 배고픈 가운데서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묵묵히 운동에 전념해온 것이 우리의 선수시절이었다. 아무런 대가가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저 운동 그 자체가 좋았고, 그래서 국위선양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세기 최고의 올림픽 영웅 김성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