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안전한 다홍빛 세계
책상을 정리하던 어느 날, 할머니의 단정한 손글씨가 적혀있는 하얀 봉투를 발견했다.
“산하, 생일을 축하한다. 할머니가”
이미 내용물은 어디 떡볶이집에서 쓰였을 것이었고 겉면의 짤막한 메모는 이토록 소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주는 작은 용돈이라도 꼭 봉투에 다정한 메모를 적어 건넸다. 유물처럼 또 발견된 어느 봉투에는,
“귀여운 사빈, 졸업을 축하한다. 할머니가”
라고 쓰여있었는데, 우리는 그 메모에 숨겨진 괄호를 덧붙여 ‘(더 귀여운)할머니가’로 남겨두었다.
나는 나에게 남겨진 빈 봉투를 발견한 날부터 몇 년째 머리맡에 그것을 부적처럼 붙여놓고 있다. 무심결에 한 번 보고 좋아서 두 번 들여다 보곤 한다.
나는 그렇게 기나긴 애도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 때는 나의 지나치게 긴 애도기간이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된 적이 있다. 할머니는 서너 해가 지나도 문득문득 나를 울어버리게 만들었다. 드라마를 보다가도 “할미가 평생 너를 지켜 줄 거야”하는 고두심의 대사에 “하하 지켜준대!!”하며 웃다가 오열을 하고 만다. 오래 공부한 시험에 합격했을 때에도, 직장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을 때에도, 결혼식을 마치고 호텔 침대에 누워 오늘 누가 왔는지 곱씹어봤을 때에도. 나는 늘 할머니를 부르며 엉엉 울었다.
나에게 할머니는 다정한 메모를 남길 줄 아는 어른이었고, 따뜻하고 안전한 세상이었다.
어린 나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꺼내 보여도 비밀을 약속하는 사람, 그 비밀을 평생 지켜준 사람, 어디서나 나를 제일로 생각해준 어쩌면 유일한 사람.
이제 할머니와 나 사이의 추억을 나눌 수 없으니, 혼자남은 내가 열심히 기록해서 남겨두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나처럼 안전했던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든, 앞으로 누군가에게 안전한 세계가 되어 줄 사람이든, 그리고 지금 불안전한 세상에 서있는 사람이든. 이 기록들이 문득문득 온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