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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을 Feb 02. 2020

할머니는 결말을 알고 있다

주말드라마의 법칙

이 집의 티브이는 채널이 하나인가 싶을 정도로 할머니는 국민의 방송만 봤다.


특히 할머니를 가장 즐겁게 했던 프로그램은 토, 일 저녁 8시에 시작하는 주말 드라마였는데, 드라마 속 인물들은 8시 반쯤 푸짐한 밥상의 삼면에만 둘러앉아 하하호호 웃으면서 밥을 먹다가도 8시 50분부터는 점점 심각해지더니 8시 59분 깜짝 놀라거나 분노할 일이 반드시 생겨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끝이 나는 그런 드라마였다.


여섯 살 즈음되었던 나는 드라마에 열중한 할머니 옆에서 종알종알 그 내용을 다 아는 체 했다.


“할머니 저 여자가 저 아줌마 딸이네!”


“할머니 저 여자랑 저 남자랑 결혼하겠지? 근데 저 둘이 아빠가 같대”


이런 종류였던 것 같다.


그러면 할머니는 세상몰랐다는 듯이 깜짝 놀랐다.


“얘 너는 여기까지만 보고 그걸 다 알아? 아직 결말도 안 나왔는데? 얘가 똑똑한 구석이 있어 정말”


할머니의 말을 전부 믿는 순진했던 나는 정말 내가 결말도 아직 안 봤으면서 인물관계를 다 아는, 1분만 봐도 내용을 파악해버리는 천재인 줄 알았다. 얼마나 으쓱해하며 한동안을 살았는지 모르겠다.


우리 할머니는 같은 내용의 드라마를 70년 가까이 봤는데도 말이다!




시간이 흘러 나의 부모님도 드라마 인생 70년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 부모님 집에서 주말을 보낸 적이 있다. 그들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주말드라마를 놓치지 않고 보는 열혈 시청자였다.


마침 드라마에선 그 집안 딸이 남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집안 행사를 아비규환으로 만드는 대단히 절정(인듯한)의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아빤 저게 그렇게 재밌어?”


약간 넋을 놓은 듯한 아빠의 뒤통수에 물었다.


“뭐 그냥 보는 거지~ 그거 알아? 저 딸 나중에 울고 사과하고 화해하고 길러준 거 고맙다고 하고 끝날 것이여. 그리고 쟤랑 쟤는 결혼하고”


천재다.


그리고 그 모든 결말을 다 알고도 이렇게 재밌게 시청하다니. 이게 바로 주말드라마가 막무가내로 대본을 써재낄 수 있는 원동력이구나!


하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다른 생각이 든다. 할머니고, 엄마고 아빠고, 이 드라마는 무료했던 주말의 유일한 오락거리.


때로는 다가오는 월요일을 회피하고 싶고, 별 약속 없는 주말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불같이 화내고 울고 웃는 남을 보고 싶을 때.


다 아는 가족적인 결말도, 뻔히 보이는 쟤와 쟤의 사랑 이야기도 그들에게는 다음 일주일을 보낼 수 있는 안부전화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자식들 대신 KBS가 그 일을 해냈습니다)


나는 아직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는 나이지만, 집 밖보다는 집 안에서의 생활이 더 많아진다면, 그리고 내 옆에서 한참 어린 시청자가 다음 장면을 예측해낸다면.


아이구 우리 천재! 나는 정말 하~나도 모르겠는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아니?


하고 호들갑을 잔뜩 떨고, 으쓱거리게 해 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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