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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대장 Sep 14. 2022

조그만 나의 공간

사는 곳

나와 남편 신혼부부형 행복주택으로 2018년 말 이사 왔다. 이곳에 오기 바로 직전에는 면목동 옥탑방에서 살다왔다. 그 이전에는 염리동 옥탑방에서 살았다. 그리고 각자 고시원에서도 살아봤다. 그랬기 때문에 전용 면적 36제곱미터의 공간은 크게 느껴졌다.


방과 거실이 분리되어있고, 신발장을 비롯하여 싱크대 상부장, 하부장의 수납공간이 , 베란다가 있고, 천장이 높았다. 현관문이 철문이라는 점과 1층 로비에 입주민만 들어올 수 있는 비밀번호 시스템까지 갖춘, 내가 살아본 집 중에서 가장 정상적인 집이다.


면목동 옥탑방은 3층 빌라였고, 옥상을 층으로 표현하면 4층이었다. 3층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 집  부부가 살았고, 3층에서 계단으로 올라오면 옥상이었다.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 바로 옆에 옥색깔의 나무로 된 옥탑방 현관문이 있었다.


옥색의 문을 열면 바로 방이었고, 성인 4명이 누우면 가득 찰 정도의 공간이었다. 방과 연결된 문을 열면 싱크대가 있는 주방이었다. 주방에서는 다시 옥상과 연결된 철문이 있었다.


화장실은 옥색깔의 현관문 바로 옆에 있었다. 그렇지만 방에서 바로 갈 수 없는 구조였으므로  방에 있다가도 볼일을 봐야 되거나 씻으려면 옥색깔의 현관문나간 뒤 옆으로 가는 구조였다. 화장실 한쪽 면은 아주 오래된 샷시여서 겨울이 되면 밖에 서 있는 것처럼 추워서 샤워를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남편은 방수천으로 샷시를 가렸고, 겨울이면 조그만 히터를 놓을 수 있는 선반을 달았다. 씻어야 될 때는 미리 화장실을 방문하여 히터를 5~10분 정도 틀어놓으면 따뜻해졌다. 그래도 춥긴 했지만 히터를 틀어놓으면 참을 수 있을 정도였다. 변기는 어쩔 수 없이 벽에 붙어있어야 하는 기능 때문에 방향이 요상했다. 한쪽 다리를 들어서 앉아야 할 만큼 변기에 앉으면 바로 앞이 샷시문이었다. 볼일을 보며 약간이라도 앞으로 수구릴 수 없었고, 허리를 꽂꽂하게 펴야 했다.


옥탑방천장은 내가 손을 뻗으면 아슬아슬하게 닿을 높이였고,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들을 둘 데가 마땅치 않아서 이사할 때 쓰는 질기고 큰 박스를 사다가 그 안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면 꺼내 쓰는 식으로 생활했다.


남편은 집에서 컴퓨터로 일을 하는 사람인데, 책상을 두기에는 방이 좁다고 판단하여 싱크대를 뒤편에 두는 구조로 책상을 싱크대 바로 앞에 뒀다.


의자에 앉아서 책상을 바라보며 일하다가, 바로 뒤돌면 싱크대에서 손까지 씻을 수 있는 신박한 구조였다.


옥탑방은 좁고 낮은 집이었다. 그래도 옥탑방의 가장 큰 매력인, 넓은 옥상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고기도 굽고, 돗자리 펴고 별도 보며 낭만적으로 지낼 수 있어서 늘 행복했다.


행복주택에 이사 왔을 때, 이곳은 우리가 첫 입주여서 모든 것들 다 새것이었다. 싱크대가 새것이라 신기하고, 화장실이 집 안에 있어서 신이 났다. 


새 아파트에서 살아보는 행운에 대해 남편과 몇 달에 걸쳐서 오래도록 얘기를 나누었다. 옥탑방도 물론 좋았지만, 여기 행복주택의 집 구조와 바닥재와 벽지와 따뜻한 물이 나오고, 변기의 위치와 방문의 모습과 작은 방의 존재까지.


작은방은 현관문과 가까워서 외출 전후로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화장을 하기도 하고, 카드와 열쇠를 챙기며, 옷매무새를 만지는 공간인데, 얼마 전에 남편이 이 공간의 일부를 조금 다르게 마련해주었다. 나의 공간으로.


나는 화장대가 없었는데, 사실 화장대가 없었어도 화장을 할 수 있는 곳은 많았다. 화장실 세면대 앞 큰 거울 앞에서나, 작은 방 한 귀퉁이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서나, 작업하는 책상에 앉아서나,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화장을 하곤 했다.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남편은 집에 있는 기구들로 작은 방에 조그만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면목동 옥탑방 화장실에서 쓰던 벽걸이용 둥그런 거울이 이곳에서 걸어둘 데가 없어서 방치되어있었는데, 이 거울을  테이블 위에 박스를 올려서 박스 앞에 비스듬히 세웠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 마트에서 산 접이식 수툴 하나를 그 앞에 놔주었다. 그것이 전부였지만, 새로운 공간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화장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시력이 매우 매우 나빠서 거울이 한 뼘 거리만 떨어져  있어도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화장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늘 하던 대로 전신 거울 앞에 서서 화장을 하거나 화장실 큰 거울 앞에서 했다. 얼굴을 거울에 얼마나 딱 붙여나 되냐면 10cm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가깝게 거울 앞에 서서 눈을 그리고 주근깨를 가렸다.

어느 날엔가 문득, 화장 도구들을 파우치에서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가, 하는 이 반복적인 행동이 불편하고 번거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마련해준 공간에 있는 비스듬하게 세워놓은 거울 옆에 눈을 그리는 붓과 주근깨를 가리는 컨실러를 한 손으로 한 번에 집을 수 있게 가져다 놔봤다.

붓과 컨실러만 거울 앞에 가져다 놨을 뿐인데, 이 작은 방에서 이러쿵저러쿵 혼자 뭔가 하는 게 재밌기 시작했다.

언제 썼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쓸 립글로스와 잘 쓰진 않지만 종종 쓰는 아이섀도도 자리를 잡아놓았다.


상자에 숨겨뒀던 기분 좋을 때 바르는 에센스를 정돈을 해두고, 좋아하는 향수를 비쩍 말라버린 디퓨저 병에 조금 덜어내고 방안에 향기가 퍼지기를 기다렸다.

서랍장을 열어서, 오래전에 받았지만 몇 번 써보지 못한 머리끈과 머리핀을 만지작거렸다. 매일 봐온 내 물건들을 정리하고 먼지를 닦는 일이 즐겁게 느껴졌다.

이사온지 함 참이나 지났는데 작은 방이 따뜻한 공간으로 느껴진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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