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 숙소를 잘 못 예약했다. 하지만 괜찮다. 상관없다. 때로는 잘못 탄 기차가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기도 하는 거니까.
이곳저곳을 함께 여행하면서 나와 남편은 빡빡하게 계획을 짜두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잘 맞는 여행 스타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특히나 계획을 한 것을 해내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생존에 매우 부적합한 성향을 지닌 내게 계획이 잘 짜인 여행은 쉼이 아니라 숙제였다. 내 나라, 내 집에서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하루 계획을 낯선 나라, 생소한 곳에서 딱딱 맞아떨어지게 맞추는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러니까 그냥 한 도시에서 꼭 보고 싶은 것 몇 가지를 구글맵에 표시하고 그날그날 일정에 맞게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그런 나도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이 있었으니 바로 숙소였다.
숙소를 정해놓지 않고 훌쩍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나는 지금도 신기하다. 물론 그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숙소를 예약하고 비행기에 오르는 나를 신기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말대로 현지의 정보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숙소를 예약하기보다 직접 가서 마음에 드는 분위기, 적절한 가격의 숙소를 찾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공항에 내려갈 곳 없는 막막함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짐을 이고 지고 가격흥정을 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사양이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선택일지라도 첫 시작점은 확실히 정해두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지금의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나는 내 집을 떠나서 알게 됐다.
아무튼 그리하여 늘 큰 틀에서 여행 계획을 짜두고 숙소만큼은 확실히 예약을 하는 나였는데, 방콕에 와서 문제가 생겼다. 며칠 뒤에 파타야로 이동하려고 예약해둔 숙소 위치를 찾아보다가 예약 내역이 없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2월에 되어있어야 할 숙소 예약 내역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페이지를 새로고침 한 후에야 날짜를 완전히 잘못 예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2월에 해야 할 예약을 3월에 해둔 것이다.
급히 일정 변경을 알아보았으나 이미 내가 원하느 날짜의 예약은 꽉 찬 상태. 호텔 측에 직접 연락을 취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숙소라 빈 방이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인테리어가 독특하고 서비스가 훌륭하다는 평이 있는 숙소라 꼭 가보고 싶었는데, 사실 태국 여행에서 가장 기대한 숙소였는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을 줄이야. 예약을 해둔 것이 너무 아까워서 남편에게 이 사태를 알리기에 앞서 아주 잠시, '3월에 또 방콕에 올까?' 싶은 생각까지 하고 있는 나였다.
물론 비상사태,라고 할 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당장 며칠 뒤에 파타야를 가야 하는데 머물 숙소가 없다는 사실에 나는 당황했다. 게다가 프로모션 가격으로 예약을 해서 무료 취소도 불가능한 상황.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 횡설수설하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최악이라고 해봐야 숙소 비용을 날리는 것뿐이야."
그 말을 하는 남편에게서 나는 엄마의 모습을 봤다. '돈으로 해결되는 일은 별일이 아닌 거야, 돈으로 해결이 안 되는 일이 진짜 큰일이지.' 그렇게 말했던 엄마. 살면 살 수록 엄마와 남편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무의식이 엄마를 닮은 사람을 반려로 고르도록 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남편은 내게서 시부모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있을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게 된 지점들이 결국 우리를 사랑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도 서늘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래,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봐야 숙소 비용을 돌려받지 못하고 비싼 가격으로 또 다른 숙소를 예약하는 것뿐이었다. 아님 방이 없어 파타야의 해변에서 밤을 새우거나. 어느 쪽이든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떻게 상황을 더 낫게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편이 나았다.
일단 최대한 돈을 돌려받아 보자는 마음으로 예약 사이트에 전화를 걸었다. 국제전화 밖에 되지 않아 한국에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바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문득 노년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재산이나 건강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주변인들과의 관계라는 연구가 떠올랐다. 위급할 때 물질적, 정서적 도움을 받을 친구가 가까이에 있는가가 결국 사람의 수명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라는 것이다. 귀찮은 기색 없이 기꺼이 도움을 주는 친구의 모습에 감동한 나는 코코넛 칩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태국에서 눈에 띄는 모든 브랜드의 코코넛 칩을 사 가겠다고 다짐했다.
예약 사이트에서는 원칙적으로 무료 취소가 불가능하지만 숙소의 허락이 있으면 해당 금액을 전액 마일리지로 적립해주겠다고 했다. 호텔에 메일을 보내 사정을 설명하고 무료 취소를 부탁했다. 호텔 측에서 흔쾌히 그렇게 해주겠노라고 해서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파타야에 갈 것인가,부터 다시 생각해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어제도 우리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왕궁이며 사원을 둘러보기로 했었다. 그런데 아침에 비가 잔뜩 내린 데다 예약 실수까지 발견하면서 오늘은 그냥 집에서 책을 읽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런 것처럼 이렇게 된 마당에 꼭 파타야로 떠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상의 끝에 우리는 파타야가 아닌, 태국의 다른 섬으로 여행지를 변경하기로 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숙소에서 책을 읽고, 문제가 생겼으면 생긴 대로 다른 곳으로 떠날 계획을 세우자는 게 우리의 결론이었다. 몇 군데 후보지를 추렸다. 북적이지 않을 것, 바다가 아름다울 것- 그거면 충분했다. 가이드북과 구글을 뒤져 방콕에서 세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거기서 또 삼십 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섬을 목적지로 정했다. 숙소 취소와 동시에 적립된 마일리지로 작은 섬의 한적한 해변가 숙소를 예약했다. 어쩐지 멋진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 인생에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계획한 대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상황은 얼마든지 더 좋아질 수 있다는 것, 잘못 탄 기차가 우리를 목적지로 이끌어줄 수도 있다는 것(*), 고개를 들어 바라본 거울 속에는 과거의 나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내가 있었다.
(*) 김민식 작가님의 책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위즈덤하우스, 2019)에 나오는 '때로는 잘못 찬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준다.'는 표현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