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질을 하던 아빠는 서랍에서 리모컨을 꺼냈다. 띠리링. 전원이 켜지며 에어컨 팬이 열렸다. 몇 주 전부터 필터를 닦아 놓고도 애지중지 바라만 보던 여름 요정의 등장이었다.
이십여 년 전 삼복더위에도 에어컨은 사치품이라며 선풍기 하나로 꿋꿋하게 가족들을 달래주던 아빠였다. 그렇기에 무더위가 찾아와도 우리 집에서 어마어마한 전기와 돈을 들여 더위를 식히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오히려, 여름은 푹푹 찌듯 더워야 제 맛이라며 한 밤에도 부채질 좀 해줘야 비로소 계절 대우를 해주며 굳게 잠겨 있던 얼음 칸을 개방했다. 땀이 나면 세숫대야에 발을 담그고 아빠가 사 온 부라보콘을 먹는 게 최고의 피서였다.
그토록 더위에 관대했던 아빠가 지금은 친정 집의 에어컨 담당이다. 동거인들의 평균 연령이 77세에 육박하는 실버하우스에서 혹서기를 냉수 찜질과 분노의 부채질만으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에어컨은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이어야 했다. 아빠는 더위와의 전쟁을 치를 때마다 가정을 지켜낼 방패를 휘두르 듯 에어컨 리모컨을 챙겼다.
강풍으로 냉방을 설정하고 기다리는데 몇 분이 지나도 좀처럼 시원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아빠는 리모컨 버튼을 하나씩 눌러보지만 바람은 여전히 뜨거웠다. 아무리 침착한 척을 해보려 애써도 리모컨을 휘두르는 아빠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냄새야.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걸.”
에어컨에서 흘러나오는 찬 바람은 곧바로 집 안을 고약한 냄새로 가득 채웠다. 설마 망가진 건가. TV도 지독한 냄새를 맡았는지 화면에 무언가 불쾌해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아직 6월이지만 한낮 기온은 35도를 기록했다는 폭염주의보 자막이 걸렸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잔뜩 화가 난 냄새. 마주치고 싶지 않은 미운 여름의 냄새는 마치 모난 공기가 얼어붙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것처럼 거칠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냄새의 근원을 파헤치려고 에어컨 팬 안을 들여다보고 바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거뭇하게 얼룩진 모양이 처음엔 강한 열기에 그을린 자국인 줄 알았으나 다시 보니 곰팡이 군락이었다.
오, 이런. 무더운 날이면 편안한 일상을 위협하는 곰팡이. 얼마나 치밀하고 영리한지 조금만 습하고 기온이 오르면 어떻게든 살림을 차리고 마는 여름의 무법자들을 확인한 아빠는 무력해졌다. 날이 따뜻해지면 부지런히 필터를 털고 본체도 깨끗하게 닦은 게 무색할 만큼 처절하게 에어컨을 녀석들에게 점령당한 탓이었다. 아빠를 위로해야 했으나 나 역시 공포에 몸이 얼어버리고 말았다. 거뭇하게 퍼진 곰팡이의 추진력에 놀랐고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자리를 잡아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치밀함에 경악했다.
아빠는 녀석들을 당장 없애기 위해 바로 세정제를 사다가 정신없이 뿌렸다. 그리곤 초강력 살균제니까 효과가 있을 거라 확신하며 세정제로 범벅이 된 에어컨 팬을 닫아 놓고 기다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큰 기대를 품고 안에 들여다보았지만 녀석들은 어떤 타격도 없이 무척 편안한 모습이었다.
일단 바로 수리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수차례의 번호를 누르고 누른 끝에 간단한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출장 기사를 예약했지만 적어도 일주일은 기다려야 했다. 이번 주는 완전히 망했구나. 아빠는 에어컨 전원을 뽑고 녀석들이 점령한 거실에서 유유히 퇴장했다. 더위를 견디지 못한 우리는 끝내 견뎌내고 만 녀석들에게 완전히 항복했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선풍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와 눕는 것뿐이었다. 문득 예전에도 이렇게 그늘을 찾아 들어온 게 떠올랐다. 에어컨이 없던 여름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의 가장자리에 창가가 보였다. 나는 바닥에찰싹 달라붙은 몸을 힘겹게 떼어내 일으켰다.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여니 쏟아져 들어오는 건 푹 삶아진 수증기였다. 고약한 곰팡이 냄새보다는 낫지만 아직도 데워지지 않은 공기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다시 바닥에 누우려는데 그 순간 창가에 걸어 둔 수건이 펄럭거렸다.
바람이 부는구나.
때마침 반대편에 틀어 놓은 선풍기도 재빨리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맞장구를 치며 제법 바람 시늉을 냈다. 차갑진 않지만 왠지 따뜻한 바람. 대야에 발을 담그면 톡 쏘듯 스쳐가는 쿨내 나는 바람. 부라보콘을 쉴 새 없이 녹이며 짓궂게 나를 채근하던 바람. 낮에도 밤에도 땀이 흐르면 찬물로 샤워를 하고 선풍기 앞에 모여 앉았던 방에 찾아오던 그 바람이었다. 시원하진 않지만 안아주듯 따뜻하게 머물다 가는 진짜 여름 바람이었다. 아직 남은 계절의 여정을 미리 일러주듯 천천히 지나가는 낯익은 공기의 흐름은 아껴 먹던 김 빠진 콜라처럼 싱겁다가도 방금 씻어 배어 문 오이 소리처럼 경쾌해서 바닥에 누워 그대로 녹아 버릴 듯한 눅눅한 마음도 치즈처럼 다시 말랑해지고 마는 거다.
더위를 조금도 견디지 못하는 나에게 여름은, 참지 못하고 달아나는 마음에 손을 내밀 듯 바람을 보냈다. 아빠가 말했던 땀범벅의 뜨거운 여름은 바람을 만나 비로소 진짜 여름이 되었다. 에어컨이 없는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오랜만에 집 안에 숨어 있던 햇살 맛집과 그늘 명당을 찾아냈고 적당히 데워진 바람을 마음껏 누렸다. 하루에 두 번씩 샤워를 하고 끼니마다 냉동실을 열어 부라보를 외치는 오래된 루틴도 개시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기다려 새 에어컨을 만나기까지 우리는 진짜 여름과 제대로 놀았다. 어쩌면 여름을 여름답게 보낸다는 건, 그대로의 계절을 만나기 위한 크고 작은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더위와 맞서 싸우며 견디는 대신, 언제 불어올지 모르지만 언젠가 땀을 식혀줄 바람을 기다리는 일, 오늘도 나는 창문을 열며 마중을 나간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곳으로 가네 햇살이 눈부신 곳, 그 곳으로 가네 - 김광석의 노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