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아래 Jun 10. 2020

왜 너의 공허는 채워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The Ocean : 불멸에 관하여 by N.EX.T

<서해 태안군의 어느 바닷가에서 - 2010년의 어느 날>

설상가상으로 비 조차 내렸다.


지독히도 안 좋은 날씨였다. 그래도 오늘은 어떻게든 그 섬을 걸어서 빠져나가야 했다.


그 주의 앞 뒤로 정말 그림같은 날씨였었다. 그 찬란한 태양, 푸른 하늘은 더위따위는 충분히 감내하고도 남을 정도로 멋진 풍경을 선사해주었다.


'왜 걷는가?'라는 질문에 있어서 ‘걸으면서 보는 풍경이 좋잖아?’라고 답을 했다면 분명 그 주에 있어서는 그게 정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한 주의 한 가운데, 고립된 섬에 있던 그 날만은 끔찍했다. 바로 1~2주 전에는 더위에 주의하라는 방송이 내려왔을 정도이지만 세찬 비와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걷노라니 온 몸이 떨려왔다.


길을 걷기 전 조사했을 때, 그 섬에는 빼어난 풍광을 가진 해변이 있다고 했다. 망망대해 서해를 바라보는 그 해변은 맑은 하늘이 수평선에 닿아 참으로 매혹적인 곳이라고 써져 있었다. 애시당초 이 작은 섬에 사는 이도 드물기에 왠만해서는 하루 종일 있어도 오가는 이 보기 힘들 그런 해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해변에 누워 지금까지의 보상을 받고 싶었다.


마침 비는 잦아들었다. 바람은 계속 불어닥치지만 몸을 때리는 빗줄기가 없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했다.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이제 곧 만나게 될 그 해변만큼은 무언가 나에게 특별한 선물을 선사해 줄 것 같았다.

<서해 태안군의 어느 바닷가에서2 - 2010년의 어느 날>

그렇게 만난 그 바다는 한 없이 흑백에 가까웠다. 


을씨년스럽다는 느낌조차 사치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기를 쓰고 걸어왔던가 하는 후회속에서 세상의 마지막이라도 본 것 처럼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며 무엇인가를 채우려 했던 것, 보상받으려 했던 것이 무참히 깨지면서 나타나는 허망함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남은 여정을 이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보상, 그 풍경을 바라며 걸었기에 스스로에게 물을 책임은 더욱 가혹했다.


그냥 거기에만 가면 다 해결되고 편할 줄 알았었는데.


90년대를 대표하는 록 그룹, 아니 헤비메탈 밴드라 불러야 할 N.EX.T, 그들이 낸 2집 <The Being>은 한국 음악사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앨범이다.


이전 1집 <Home>에서 시도한 헤비메탈과 일렉트로니카의 결합은 그 자체로 사운드적 혁명과 같았다. 다만 다들 생각했던 사회를 향한 직설적인 메세지는 <도시인>과 <Turn Off The T.V> 두 곡에 머물렀다.


의외로 N.EX.T는 대중에 대한 메세지보다 한 개인의 감성과 성장에 초점을 맞췄다. <인형의 기사 Part 2>가 그랬고 <아버지와 나 Part 1, 2>, <증조할머니의 무덤가에서>, <외로움의 거리>, <영원히> 등 대부분의 곡들이 개인에게 집중되어있다.


이런 개인에 대한 고찰은 2집 <The Being>에 들어와서 비록 곡 수는 적어졌을지언정 (묘하게 사회비판과 개인의 고찰에 대해 5:5의 비율을 가진다.) 내용적으로는 더 깊이를 더한다. ‘감성’으로서의 접근이 아닌 ‘내적 욕망’과 ‘그릇된 독선’에 대해 꼬집는다.

<그의 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그 중 개인적으로 단연 2집의 최고라 해도 좋을 곡은 <The Ocean : 불멸에 관하여>다.


이 곡은 기묘하게 밴드의 리더인 신해철이 1996년 발표한 영화 ‘정글스토리’의 OST 중 <절망에 관하여>와 맥락이 닿아있다. 더 나아가 <절망에 관하여>의 발표와 동년도인 1996년에 윤상과 함께 한 프로젝트인 ‘노땐스’와도 이어볼 수 있다.


<The Ocean : 불멸에 관하여>가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망상을 꿈 꾸는 자, 채워지지 않을 것을 채우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은 자를 꿈꾸었다면 ‘노땐스’에서는 그 어리석은 자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질주>와 <기도>에서 마치 발광과도 같은 행태를 보이는 자는 <월광>에서 그 광기의 끝을 보여준다. <절망에 관하여>는 그 말로이다. 말로는 죽음 뿐이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후회를 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 초라한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던 기회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다. 

<故 신해철씨를 추모하며, 채울 수 없는 것도 있음을 알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 그것이 ‘영리’를 목적으로한 상업행위처럼 명확한 것이 아닌, 보이지 않고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려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무서운 일이다.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목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와도 같기 때문이다.


그럴경우 위에서 얘기한 <불멸에 관하여> - ‘노땐스’의 대표곡들 - <절망에 관하여>의 수순을 밟기 딱 좋다.


다만 그것을 인지하고 불명확함을 완벽히 인정한 상태에서의 행동은 당연히 구분되어져야 한다. 그런 사고 내에서의 행동은 오히려 다양한 가변성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끔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쉽게 상상한 도달치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간 어려운 말이라면 ‘길을 걷는 행위’에 대입해보자.


우리가 길을 걸을 때 그 목표를 ‘완주’로 구체화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꼭 큰 의미를 두지 않더라도 모든이는 길을 걸으며 ‘완주’를 생각하니 이만큼 선명한 목표는 없다.


그렇다면 ‘완주’의 목표하에 그 길을 걸으며 또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도 생각해 봐야할 것 같은가? 아니, 난 절대 생각해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 안에서 얻게 될 것, 만나게 될 것, 그리고 깨닫게 될 것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목표치를 잡지 말라. 상상하고 염원하지 말라.


우리가 그것을 상상하고 바라는 순간, 그 길은 나에게 그것을 주어야만 온전한 길이 되어버린다. 그것에 집착하면 할 수록 그 기대치에 걸맞지 못한 만남과 경험은 코웃음으로 남는다. 물론 아무런 생각없이 마음을 비우고 걸었다면 무한히도 채워졌을 지 모를 것들이다.


그래서 나에게 그 비가 내렸던 섬의 길과 비가 그친 후의 무채색 해변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그 위를 날며 한껏 나를 조롱하던 한 마리 갈매기도 말이다.


아무 느낌 없이, 아무런 기대 없이 걸었다면 비가 그친 후의 그 고요한 해변을 오롯이 홀로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풍경에 욕망과 기대치가 들어간 순간 그 곳은 세상의 끝과 같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PR0Rug5QVic


-불멸에 관하여-


바다, 검푸른 물결 너머로 새는 날개를 펴고

바다, 차가운 파도 거품은 나를 깨우려 하네

슬픔도, 기쁨도, 좌절도, 거친 욕망들도

저 바다가 마르기 전에 사라져 갈텐데…


그대여 꿈을 꾸는가, 너를 모두 불태울 힘든 꿈을

기나긴 고독 속에서 홀로 영원하기를 바라는가…


사라져가야 한다면 사라질 뿐, 두려움 없이. 


처음 아무런 선택도 없이 그저 왔을 뿐이니

이제 그 언제가 끝인지도 나의 것은 아니리.

시간은 이렇게 조금씩 빨리 흐르지만

나의 시간들을 뒤돌아 보면 후회는 없으니.


그대여 꿈을 꾸는가, 너를 모두 불태울 힘든 꿈을

기나긴 고독 속에서 홀로 영원하기를 바라는가…


사라져가야 한다면 사라질 뿐, 두려움 없이. 


그대 불멸을 꿈꾸는 자여.

시작은 있었으나 끝은 없으라 말하는가.


왜 너의 공허는 채워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처음부터 그것은 텅 빈 채로 완성되어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진안군 답사 중, 누군가 그 길을 걷기를 바라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