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ㅣ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Alice In Earnestland
[영화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올해로 11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 올라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1년째 세계 1위를 지키고 있을 줄이야. 그런데 기사 댓글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헬조선 이게 무슨 말인고?
살펴보니 20~30대 청년들이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20대임을 밝힌 누리꾼들은 대한민국을 두고 ‘헬(hell, 지옥)조선’이라 했다. 불기둥이 치솟는 한반도라는 뜻으로 ‘지옥 불 반도’라는 표현도 있었다.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지옥과 같이 살기가 힘든 곳이라 자살률 1위라는 소식도 놀랍지 않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옥’ 같은 이 나라를 뜨기 위해, 이들의 표현에 따르면 ‘탈(脫)조선’ 하기 위해 ‘이민계’를 드는 청년들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주로 핀란드나 덴마크와 같이 사회 보장 제도가 잘 된 ‘북유럽 국가’로의 이민을 희망하고 있으며, 용접, 자동차 정비 등 기술을 연마해 ‘기술이민’을 노리고 있다.
청년이 희망을 품지 못하는 나라에 미래는 없을 터. 성실한 청년을 실성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면면을 코믹하게, 그러나 무자비하도록 참혹하게 그려낸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소개한다.
중학교 졸업반이던 열여섯 살의 정수남(이정현)은 인생 최대의 갈림길에 선다. 집 옆에 있는 공장에 취직해 ‘공순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여상으로 진학해 ‘엘리트’의 길을 걸을 것인가. 깊은 고민 끝에 수남은 ‘엘리트’가 되기로 결심한다.
타고난 손재주가 있었던 그는 닥치는 대로 자격증을 따기 시작한다. 주산, 부기 등 자격증을 14개나 따서 금의환향한 금메달리스트처럼 목에는 꽃 화환을, 칠판에는 현수막을 걸고 선생님들 사이에서 기념사진도 남긴다.
하지만 엘리트로서 수남이 누릴 영광은 딱 거기까지였다. 수남의 타고난 손재주는 이내 ‘콤퓨타’의 등장으로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는 수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십 년 사이에 인간의 일자리 중 절반 가량이 로봇에 넘어갈 것이라는 전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사람과 로봇이 일터에서 나란히 일하는 시대를 지나,
로봇이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시대로 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8월 25일 자 보도]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2025년 미국에서 자동화로 2,27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회계나 출납, 계산, 부동산 거래, 제품 수리, 기기 점검, 음식 주문 및 배송 등 그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수남은 빠르게 방향을 전환하여 컴퓨터가 없는 작은 공장에 경리로 취직한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남자도 만난다. 하지만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내 자식은 나처럼 키우지 않겠다”며 ‘집’에 집착하는 청각장애 남편의 수술을 위해 2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였지만, 결국 기계 오작동으로 사고를 당해 남편의 손가락이 절단된다.
집 대신 수술을 고집했던 수남에게 극도의 반감을 품은 채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남편을 바라보며 수남은 결심한다. 남편이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집을 갖게 해주기로.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건물 청소, 식당 주방일, 신문 배달, 가정집 청소 등등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달인’의 경지라 느껴진다. 억척스럽지만 예의 타고난 그 손재주를 십 분 발휘한다.
영화의 안국진 감독은 실제로 한 공중파 방송국에서 전파를 타고 있는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며 영화를 떠올렸다고 한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째 같은 일을 하며 여전히 노동자로서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수남에게 담은 것이다.
시간이 없어. 잠은 나중에 자면 돼. 일을 더 해야 해. 나만 힘들면 돼.
성실함을 무기로 내세웠지만, 일해서 돈을 버는 속도로는 집값 오르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달동네에 1억 4천만 원 대출을 끼고 내 집 마련에 성공한다. 9년 동안 개처럼 일하며 살아내느라, 사랑하는 남편을 행복하게 해주느라 그의 손은 이미 다 부르트고 행색은 남루하기 그지없었지만 남편이 오매불망 그리던 ‘집’이 생겼으니 다 괜찮다고 여겼다.
하지만 남편은 행복하지 않았던 듯싶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불편한 손으로 애써 집에 헹거를 설치한 뒤 기분 좋게 목욕을 하고 말끔히 옷을 차려입은 뒤 그 헹거에 목을 맸다. 결국 수남의 남편은 식물인간이 되었다.
가망이 없다
병원에서는 병원비를 못 내는 수남의 상황을 고려해 ‘존엄사’를 권한다. 수남에게 씨알도 먹힐 리 없다. 남편이 깨어나리라는 희망 하나 보고 살아가는 수남은 살던 집에 세를 주고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남편 수발을 든다. 그런 그에게도 드디어 볕이 든다. ‘재개발’이다.
하지만 세상에 절로 되는 것은 없다. 달동네 중 수남의 집을 포함한 일부에만 재개발 소문이 돌면서 옆 동네 주민들이 시위를 시작한다. 공무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민원’. 남편의 병원비도 해결하고 이제 정말 행복해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 여겼던 수남은 구청 직원의 말에 따라 재개발 동의 서명을 받으러 돌아다닌다.
영화의 코믹하지만 잔혹함이, 잔혹하지만 씁쓸함이 증폭되는 부분이다. 이 과정에서 수남은 우발적으로, 그리고 자기방어적으로, 다분히 의도적으로, 종국에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을 죽인다.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수남이 용의자로 의심을 받게 된다. 그러기에는 너무 불쌍하다는 젊은 형사의 말에 선배 형사는 이렇게 말한다.
원래 불쌍한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는 거야. 그래서 더 의심스러운 거야
이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상담사를 찾아간 자리에서 수남은 이렇게 말한다.
미안해요. 그러니까 내가 죽이는 거 이해해주세요.
이 과정에서 수남을 비롯해 인물들이 가진 욕망이 극대화된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수남의 욕망, ‘너만 잘되는 꼴은 볼 수 없다’는 최 원사의 욕망, 상담사의 관심을 받고 싶었던 세탁소 사장 형석의 욕망, 고상한 척하지만 결국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한 상담사 경숙까지. 주인공이 수남이라 수남의 입장에서 영화가 전개되었을 뿐, 결국은 각자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애썼을 뿐이다. 결국 아무도 행복해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결국 원래 계획대로 수남의 집을 포함한 지역에 재개발이 이뤄진다. 지금껏 악착같이 일하며 몸으로 돈을 벌어온 수남에게 드디어 ‘불로소득’이 생긴 것이다. 목돈을 손에 쥔 수남은 밀린 남편 병원비를 모두 수납하고 핑크색 스쿠터도 한 대 뽑는다. 산발한 머리, 꾀죄죄한 차림새 위에 멋들어진 가죽 재킷을 입고 옆자리에 여전히 의식 없이 숨만 쉬는 남편을 태운 채 바다로 향한다. 9년 전 가지 못한 신혼여행이다.
생각해보면 수남이 바란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수남에게 그 소박한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수남에게 그 행복을 허락하기에 파이는 너무나도 작고, 그 작은 파이를 가지고자 하는 수남과 같은 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가 유행했었다. 우선 기업과 부유층의 소득이 증가하면 투자와 고용이 활발해져 경기가 부양되고 저소득층에도 혜택이 돌아가 소득 양극화도 해소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낙수효과가 가져온 것은 가진 자들의 파이를 키우는 데서 끝났다. 덜 가진 자는 더 못 가진 자가 되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대선 ‘경제민주화’가 주요 아젠다로 등장하면서 낙수효과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대한민국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경제를 살린다는 이유로 대기업이나 부자들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주고 중산층 이하 저소득층에게는 빚을 내어 집을 사고 소비를 하면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인간’은 사라지고 ‘돈’만 남았다. 노동의 가치는 가진 자들이 덜 가진 자들을 지배할 때 사용하는 허울 좋은 레토릭일 뿐, 돈에 의해, 돈이 만들어낸 기계에 의해 노동의 가치, ‘가지지 못한’ 인간의 가치는 점점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널리 모든 인간을 이롭게 하는 세상을 꿈꾸며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내세워 나라를 세웠다. 또한 ‘강재이뇌신(降在爾腦神)’이라 하여 모든 인간의 뇌에는 이미 하늘이 내려와 있다며 인간의 가치를 무엇보다 높게 보았다.
언제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게 될까. 내가 귀한 만큼 남이 귀한 것을 알고 가장 먼저 ‘사람’을 위하는 세상이 될까. 행복을 위하여 매사 성실했던 수남을 실성하게 만드는 세상을 보며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시 돌아본다.
만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