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ㅣ 이터널 선샤인]
그 시간, 그 장소에 나와 당신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에 빠진 것일까.
아니면, 그때 거기가 아니었더라도 나와 당신은 결국에는 만나 사랑에 빠질 운명이었던 것일까.
내가 당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운다면, 우리는 평생 모르는 사람인 채로 살게 될까.
'특정 기억 삭제’를 소재로 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 10년 만에 다시 극장에 걸렸다.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이라는 뜻을 가진 이 영화가 강산도 변한다는 그 지난한 세월을 지나 돌아왔다. 스무 살 적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서른을 넘기고 나서야 제대로 된 장면들로 다가왔다.
영화는 생기 없는 아침, 세상 제일 출근하기 싫은 사람처럼 이불킥을 하며 일어난 조엘(짐 캐리)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오늘은 2004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는 카드회사의 상술이라 여기는 조엘은 무작정 몬토크 행 기차에 몸을 욱여넣는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라며 회사를 재끼고 찾아간 몬토크의 어느 해변. 욕이 절로 나올 만큼 매서운 바닷바람을 홀로 맞는다. 일탈은 했지만 조엘은 여전히 따분하고 지루하다. 그는 처량하게 바닷가 어느 계단에 앉아 일기장에 뭔가를 끄적이다가 모래 장난을 하다가 이윽고 이런 생각에까지 이른다.
‘누구라도 좋으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발길 가닿아 도착한 어느 식당에서 사람들 몰래 물컵에 술을 따라 마시는 파란 머리 여자와 눈이 마주쳐 눈인사를 나눴다. 조엘은 티끌만 한 관심만 받아도 이내 사랑에 빠져버리고 만다. 다시 돌아가기 위해 찾은 기차역에서 또 마주친 파란 머리 여자. 기차도 같이 탄 두 사람. 조엘은 어느새 일기장에 그 파란 머리 여자를 그리고 있다.
“Hi."
드디어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매사에 걱정이 많고 조심스러운 조엘과 무얼 하든 천방지축 충동적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만났다. ‘이렇게 사는 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하던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리도록 차가운 몬토크의 겨울 바다에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지만, 그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다. 1년 뒤 발렌타인데이를 앞둔 어느 날,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떠났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클레멘타인은 조엘과 관련한 모든 기억을 지웠다.
뒤늦게 친구로부터 그 사실을 알게 된 조엘도 아픈 기억만을 지워준다는 회사 ‘라쿠나’를 찾는다. 그리고는 상처로만 남은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한다.
라쿠나 주식회사가 설명하는 ‘기억을 삭제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기억을 지우고자 하는 대상과 관련된 모든 물건을 통해 대상과 관련하여 나의 뇌에 있는 정보를 추려낸다. 그리고는 특별한 알약을 먹고 머리에 장비를 쓰고 잔다. 잠든 사이 가장 최근 기억부터 시작해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이 삭제된다.
라쿠나 주식회사의 대표인 하워드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각각의 기억마다 감성 중추가 있어요. 그 중추를 제거하면 기억이 소멸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기억은 꿈결같이 사라지게 될 거에요.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뇌에 손상을 주는 것이죠.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기는 정도에요.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침대에서 일어날 거에요. 그 사람을 몰랐던 때의 내가 되는 거죠.
라쿠나 주식회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옛 영광을 잊고 싶다는 듯 오래된 트로피를 갖고 오는 사람, 애완견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개껌부터 사진까지 추억이 담긴 물건을 들고 온 사람도 있다. 모두들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나 아픔,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이다.
사실 '기억'은 영화에서 다뤄온 오래된 소재다. 영화 '메멘토'에서는 10분마다 기억을 잊어버려 몸에 기억의 단서를 새겨야 하는 남자가 등장했다. '인셉션'에서는 기억을 세분화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단계로 들어가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기억상실증은 드라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뇌는 과연 어떤 작용을 통해 기억할까. 기억을 저장하고 회상하는 데는 전두엽이, 감각이나 인지 정보 처리는 뇌의 많은 부분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감각을 접하면 가장 먼저 대뇌를 구성하고 있는 100억 개의 뉴런 중 일부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전기자극을 전달한다. 이 자극은 축색과 수상돌기, 시냅스를 통해 여러 개의 뉴런으로 뻗어 나간다. 이러한 반응으로 만들어진 신경전달물질에 반응해 축색과 수상돌기가 서로 뻗어 나가며 감각이 기억으로 '저장'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감각에서 기억으로 저장된 것을 삭제하는 과정이므로 기억에서 감각으로 그 방향이 역전되어 진행된다. 가장 최근, 그러니까 클레멘타인이 조엘의 집에서 뛰쳐나오는 기억에서부터 시작된다.
데자뷰 같은 현상이 지속된다. 클레멘타인을 쫓아 나왔지만 어느 순간 삭제된 기억 속에서 조엘은 자신의 감각이 둔해졌음을 느낀다. 조엘은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 클레멘타인에 대한 분노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든 채로 클레멘타인이라는 기억을 하나하나 지워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조엘은 클레멘타인으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녀에게 빠져 눈을 떼지 못했던 그 순간, 꽁꽁 언 호수 위에 누워 함께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순간. 잊고 싶다고만 생각했던 기억들이 지워지고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에 조엘은 이를 멈추고만 싶다.
이때 생각해낸 것이 바로 더 깊은 장기기억으로 클레멘타인을 데리고 가는 것. 엄마에게 관심받고 싶었던 네 살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 보지만 이 기억마저도 지워진다. 자위를 하다가 엄마에게 들켜버린 수치스러운 기억, 어린 시절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던 기억으로 클레멘타인을 데리고 가보지만 이 역시도 모두 지워지고 만다.
한 번만 더 다르게 생각했다면 달라졌을 텐데…
결국 조엘은 클레멘타인과 연결된 최초의 기억에 이르고 만다. 남아있는 마지막 기억인 것이다. 여기서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제대로 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다. 결국엔 모든 기억이 사라지겠지만, 그래서 지금이 두 사람에게는 마지막 순간이겠지만 온전히 지금에 있겠다는 마음으로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조엘은 클레멘타인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는다.
영화는 그렇게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조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가기 싫은 회사에 가기 위해 침대에서 이불킥을 하며 일어난다. 오늘은 발렌타인데이. 이렇게 쓸데없는 날은 누가 만든 것인가 생각하던 중 충동적으로 회사가 아닌 몬토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욱여넣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클레멘타인을 만난다.
사랑은 그렇게 다시 기억된다.
우리는 숱하게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또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중에는 언젠가 어디에서든 한 번은 다시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지금 이대로 그때 그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은 이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앞으로도 우리는 쉼 없이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조엘이, 클레멘타인이 그랬듯 시작할 때는 상대방이 좋아진 이유였던 것들이 결국에는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이유가 될지라도 말이다.
세상에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같은 건 없다. 누구나 힘든 기억, 떨쳐버리고 싶은 트라우마 하나쯤은 있다. 태양이 아무리 밝아도 흑점이 있듯이 말이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실망하게 되겠지. 아니 이미 상당 부분 실망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 난 지금 당신이 좋으니까. 결국 지금 이 순간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 순간들이 모여 내 인생을 풍요롭게 채워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만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