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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일 Jun 22. 2017

이름에 관한 단상


강원도 인제 원대리 ‘속삭이는 자작나무숲길’

자작자작은 자작나무가 타는 소리다. 그런데 이 의성어의 색깔은 흰색일 것 같다. 자작자작 소리를 들으면 자작나무의 흰 수피가 떠올라 그럴 것이다. 이름은 단지 이름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름은 이름 너머로 달려간다.



1.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름을 짓는 것만으로 내용이나 본질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한반도 운하사업’의 이름을 ‘4대강 사업’으로 바꾸자 이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잠잠해졌다. 무상급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세금으로 운영되는 유상급식이지만, 무상급식이라는 이름을 선점하자 무상급식론자들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대통령 선거로 한창이든 2012년 12월, (탄핵될지도 모르는) 박근혜 씨를 위해 모처에서 국정원 요원이 댓글을 단다는 정보를 입수한 민주당 의원들이 현장에 찾아갔을 때, 국정원 요원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이 사건은 ‘잠금 사건’이었지만 ‘감금 사건’으로 회자되었고 박근혜 씨는 민주당이 무고한 시민을 감금했다고 역공을 퍼부었다.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바꾸겠다는 주장에 노회찬은 “대신 ‘박정희 씨’를 ‘구미 씨’로 개명하는 건 찬성입니다.”라고 되받았다.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바꾸자는 주장은 이 한 마디 말로 깔끔히 정리되었다. ‘문자폭탄’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문자행동’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름이 본질을 결정하기도 한다.  

   

2. 

    이름 없는 것들은 늘 이름을 요구한다. 이름을 요구하는 것들은 새롭거나 새로워지려는 것들이다. 혹은 자신을 갱신하고 싶은 사람은 이름을 개명한다. 이름을 붙일 때 비로소 새로운 것으로 거듭난다.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면 다른 아기들과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름은 대상을 유일무이하게 만든다.     


3. 

    이름에는 뜻이 없다. 고유명사들, 예컨대 이영애, 공유 같은 이름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강타’니 ‘지드레곤’이니 ‘랩몬스터’니 하는 이름 따위도 마찬가지다. 강타라는 이름이 ‘강타하다’를 염두에 두고 지었다 하더라도, 강타를 보며 ‘강타하다’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강타’는 그저 강타일 뿐이다.     


4. 

    이름은 아무렇게나 지을 수 있지만 한 번 정해지면 고정되어 버린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한국국제예술원에서 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본 일이 있다. 유명한 가수들의 사진이 붙고 그 아래 교수들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렇게 말이다. (힙합계의 전설) MC메타 교수, (최고의 보컬리스트) 더원 교수, (천재적인 작곡가) 돈스파이크 교수 등등.    


5. 

    이름에는 나름의 무게가 있고, 값이 있다. ‘MC메타’가 음악시장에서 자신의 본명인 ‘이재원’을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MC메타’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가수로서의 이력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상징이다. 그런 점에서 이름은 그 자체로 이미 물신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들으면 그 이름에 상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이름은 한낱 말에 지나지 않으나 그 이름을 한낱 말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6. 

    한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신기해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곡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버리는 것 같아요.”(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비행운�, 문학과 지성사, 2012, 21~22면)    


7. 

    나의 이름은 공강일이다. 내 이름은 특이해서 사람들은 나 역시 특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특이해지려고 애쓰며 살았던 것 같다. 이름은 나를 잠식한다.    


8.

    모든 언술은 동어반복적 성격을 띤다. 동어반복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든 말들이 이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정의(定意)를 사용한다. 정의의 핵심이 바로 동어반복이다. 예컨대 나무의 사전적 의미는 “줄기나 가지가 목질로 된 여러 해살이 식물”이다. 나무는 목질로 된 식물 즉 나무다.

'이름'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물, 단체, 현상 따위에 붙여서 부르는 말"이다. 이름은 붙여서 부르는 말 즉 ‘이르다’에 명사형 어미 ‘~ㅁ’이 덧붙여진 형태다. 이름은 이러지고(불려지고), 삶은 살아지고, 사람은 살아간다. 이름 즉 명사가 있기 전에 동사가 있었고, 이 동사를 축약한 것들이 이름이 된다.    


9.

    형상을 가진 것만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다'라는 동사는 어떤 행동에 대한 이름이듯 '슬프다'라는 형용사 역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명사만 '이름'인 것이 아니라 모든 품사가 '이름'이다. 그러하다면 모든 언어는 이름으로 되어 있다. 나아가 모든 것들은 언어를 통해서 물질적 형상을 얻게 된다, 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her》에서 테오도르는 컴퓨터 운영체계에 불과한 사만다와 교감한다. 그때 그는 사만다의 얼굴을 "손끝"으로가 아니라 '언어의 끝'으로 만진다. 형체도 없는 사만다는 "내 피부가 느껴져"라고 말한다. 언어가 그녀에게 물질적 피부를 부여한다.    


10.

    '썸 탄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쟤들, 뭐 있는 거 아냐?"에 상응한다. ‘썸’은 '뭐'에 해당하는 말이다. 허나 "나 요즘 걔랑 ‘뭐’ 있나봐"라고 말하진 않는다. ‘썸’은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규정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뭐’와 구분된다. '뭐'는 폐기되고 '썸'은 의미가 된다. 그런 점에서 이름 짓기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예술의 정치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일이 예술의 사명이라면 예술가의 예술행위를 이름 짓기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김춘수의 시 「꽃」은 랑시에르의 말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략…)    


11.

이름은 시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지기도 한다. 이름은 그렇게 닳아 형체 없이 사라진다.



*이 글은 <<경북매일>>신문에 발표했던 것을 수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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