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일 Jun 23. 2017

리기산과 안니

사라지지 않는 것들

    63빌딩 아래에서는 63빌딩의 크기를 알 수 없었다. 올림픽도로에서 그 규모를 실감할 수 있었다. 서울 사람들은 저렇게 크고 웅장한 것을 매일 보니까 간이 큰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갔을 때는 가이드를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밖으로 나와 박물관의 벽면을 따라 차로 한참을 달린 후에야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멀리에서만 크기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에펠탑도 개선문도 그랬다. 큰 것들은 너무 커서 막상 그 곁에서는 규모를 알 수 없다. 그런가하면 떨어져 있을 때 몸서리치도록 소중해지는 것들도 있다. 9일 가량의 여행 동안 나는 몹쓸 만큼 큰 것들을 보았고, 터무니없이 소중한 것이 나에게 있다는 것도 알았다.     

스위스 루체른의 알트 골다우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리기산으로 오르는 길.

산을 오르기 전 안개가 자욱해서 리기산에 올라봐야 아무것도 못 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산은 생각보다 깊고 높았다. 자연은 그야말로 거대했고 내 생각은 그저 인간적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안개는 얕고 낮은 인간의 땅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리기산은 안개의 바다에서 우뚝 치솟아 있었다. 산은 깊고 높았으며 빛은 늘 인간의 머리 위에서 빛났다.


리기산과 마음

    유럽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연에 대한 믿음이며, 다른 하나는 관심과 배려가 가진 힘이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긍정이다. 내가 좋아하는 로맹가리는 언젠가 “조금 시적이긴 하지만……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야 할 터. 그것이야말로 영혼이 과학에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12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난 10월, 나도 한 자락 참여한 공학 책이 출간되었다. 내가 한 일은 그저 저자의 말을 들어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이야기를 듣는 동안 3년이란 시간이 훌쩍 흘렀다. 저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공학이 언젠가 우리의 삶을 집어삼키고 말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즈음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인간은 100년도 채 존속하지 못하리라는 말을 했고, 그 말이 내 생각을 눌러 완고한 믿음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나는 알프스의 한 자락에 불과한 리기산에서 이 불안을 조금은 씻을 수 있었다. 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든 인공지능이든 혹은 알 수 없는 미래든 망연자실해지고 말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했다. 알프스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 크기는 물론 그 경관까지 말이다. 루체른의 리기산은 1800m에 미치지 못했으나, 인간이 머무는 곳은 턱없이 낮았다. 카메라는 깊이를 담지 못했고 눈으로는 도무지 새길 수 없었다. 결국 마음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비로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어가 아니라 감각할 수 있는 물질적인 것으로 마음이 다가왔다. 그 마음을 긍정할 수 있었다.     


기차에서 만난 안니의 배려

    파리에서 벨포트까지는 기차를 탔다. 옆에는 한 여성이 앉았다. 나는 되지도 않는 영어로 말을 붙였는데 그녀의 영어는 유창했다. 그녀는 페루에서 파리로 유학을 왔다고 말했고, 나는 나스카 라인을 이야기하며 아는 채를 했다. 그래서였는지 《해를 품은 달》과 같은 한국의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그녀는 말했고,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한국의 자연경관을 무척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더욱 반가웠다. 그녀의 나라에서 산이라 불리는 것들은 해발 6000m가 넘는다는 것을 얻어 들었고, 그녀가 가본 유럽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곳이 스웨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로스쿨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 있으며, 특히 인권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공항의 경찰들이 유독 유색인종들의 신분증을 검색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는 말을 했다. 

    명사만 늘어놓는 내 말들을 그녀는 잘도 알아들었고, 답답해 하는 내색도 없이 내 말을 들어주었다. 또 아주 편안하고 쉬운 영어로 답해 주었다. 그녀가 내 말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듣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지만, 나는 그녀와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 더딘 말을 지긋이 들어주었고, 신경을 써서 내 말을 완성해주었다. 어쩌면 대화는 말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고 상대를 배려해주는 마음씀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랑시에르는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공동 공간의 거주자로 자리 잡기에 필요한 시간을 가질 때, 자신들의 입이 고통을 표시하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공동의 것을 발화하는 말을 내보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가질 때 발생한다. 자리와 신분의 이러한 배분과 재배분은, 공간과 시간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소리와 말의 이러한 절단과 재절단은 내가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라고 했다(<미학 안의 불편함>, 55면). 그의 말처럼 우리가 시간을 내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준다면 알아듣지 못할 말은 없을 것이며, 누군가가 침묵 속에 서성거리는 일 역시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도 당신도 우리가 되어 우리는 홀로 태어나지 않아도 될 것이며 홀로 죽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시간을 내어서 내게 말을 붙여준 산과 머뭇거리는 내 말을 성실히 들어준 안니에게도 고맙다. 나도 이제 그만 여행의 언저리에서 떠돌고 삶으로 돌아와 가까운 곳의 말들을 들어야겠다. 더불어 소중한 당신의 말에 모든 오감을 기울여야겠다.



*경북매일에 실은 글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름에 관한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