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꿈을 꾼다. 꿈자리가 사납다. 사납고 무서운 꿈을 꾼다. 악몽. 싸우는 꿈이기도 하다.
먼 집에 갔다. 가족이 다함께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엔 할머니가 왔다. 할머니가 오신 기념으로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예전에 지내셨던 방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엄마의 주도였다. 계단을 한 층 내려갔다. 또 다시 좁은 계단을 내려가며 아 어디까지 내려가야 해 했다. 눈앞에서 하나의 문이 닫히고 나와 동생이 남았는데, 바로 옆에 있는 벽에 걸린 장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주워다 어떻게 다시 붙여야 하나 허둥거렸다. 핀을 벽에 찔렀다가 뺐다가 장식에 달린 끈을 그 위에 걸었다가 벽에 밀었다가. 장식은 길쭉한 육각기둥 모양이었고 얇았다. 똑같은 모양 두 개가 벽에 있었다. 계속 허둥대고 있자니 동생이 방법을 일러주었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과연 이렇게 하니까 되었다. 나는 이렇게 해놓고도 이게 맞나 싶어 계속 허둥거렸다. 결국 동생이 손을 댔고, 원 상태로 복구하며 말했다. 어쩌면 누나가 어렸을 때 누나 엄마랑 놀다가 이랬는지도 모르지.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기분이 나빴다. 하하 그래 하고 웃어 넘길 수도 있었다. 대신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있다가 너 말 그렇게 해라? 했다. 어. 무심한 대답이었다.
눈앞에서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온 가족이 짐을 나르고 있었다. 엄청 넓은 공간에 낮은 책장이 가득하고, 온갖 잡동사니가 옮겨지고 있었다. 앞 문장은 다시 쓰거나 쪼개고 싶다. 이 공간은 마치, 이 구성은 마치 내가 어렸을 때를 회상하면 나타나는 그림인데 싶었다. 꿈 속에 자주 등장하던 이미지 혹은 흐릿하게 기억하는 어느 장면의 한 페이지가 연상되는 곳이었다. 아, 이 곳이구나. 그보다 나는 짐을 나르고 있는 가족들에게, 언제 모였는지 모를 이모와 삼촌과 숙모와 등등을 향해, 화가 났다. 정확히는 엄마에게 그 화를 쏟아 부었다. 이러려고 여기 온 거지? 내 앞에는 책상 위에 종이 같은 것이 흩어져 있었다. 이거 하려고 여기 온 거 맞지? 짐 나르려고? 나는 안 할래. 이거 들고 그냥 올라가도 될까? 삼촌이 아따 왜 저런다냐 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엄마는 부끄러워했다. 돈 받고 하든지. 아 어떻게 된 가족이 뭐만 하면 다 돈이야?!!!! 안 받아!!!!! 안 해!!!!! 소리친 나는 뒤돌아 좁은 계단을, 넓은 계단을, 한 층 한 층 다시 올라 조금은 호화로운 내 방에 닿았다. 부엌에 있는 할머니에게 존재를 들킬까 천천히 문을 닫았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살짝. 소리없이. 고민하다 방 불을 켰다. 스위치는 총 세 개였는데 그 중 가운데를 켰다. 가장 어두운 조명이었다. 아주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집에 가야지. 원래 하루 더 자고 가기로 계획된 일정이었다. 차없이 나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런 거 됐고 그냥 가야지. 어차피 버스 타면 되던데, 나 알아.
농을 열고 옷가지를 주워담았다. 챙길 옷이 많네. 옷걸이도 가져가야 하나. 내가 가져왔던 거니까? 이 옷을 챙겨야 하나 놓고 가야 하나 멈칫하는데 잠그지 않았던 방문이 살짝 열렸다. 아빠였다.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했다. 나는 이대로 입 다물고 조용히 있을까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아빠는 단번에 내 쪽을 향해 물었다. ...누가 지금 일어났나? 괜히 부시럭거리는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공중을 더듬는 아빠의 손을 툭 쳤다. 나 집에 갈 거야. 지금 가게? 오늘밤 태풍이 온다는데. 잘 챙겨서 가. 조심해서 먼저 가 있어. 아빠는 왜 지금 가냐거나 왜 밑에서 가족들 돕지 않고 혼자 가냐거나 묻지 않았다.
꿈은 끝났고 꿈은 사나운 꿈자리라는 두 어절로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다가 아침부터 침대에 배 깔고 누워 넷북을 켜게 했다. 여기까지 끌려왔다.
어젯밤 앞으로의 치약 사용을 두고 엄마와 다투었다. 시작은 화장품이었다. 뉴스킨 정기구매를 하려면 월 6만원 어치를 구입해야 한다는데. 무슨 화장품을 한 달에 6만 원을 사. 6만 원 그냥 차. 아니 그래도 무슨 화장품을 매달 사? 그래야 할인을 받지. 그거 할인 안 받으면 더 비싸. 더 비싸게 주고 6만 원 안 되게 사는 게 낫지. 그거 할인 받자고 6만 원 채워? 6만 원 금방 찬다니까? 화장품은 그래서 쓰긴 쓸 거냐. 치약은 어떡할 거냐. 아 치약은 안 써. 치약을 왜 안 써? 시중에 파는 게 얼마나 안 좋은데. 아 치약은 안 써. 치약이 얼마나 중요한데 왜 안 써. 그렇다고 만 원짜리 치약을 쓸 수는 없어. 정적. 안 좋은데, 그럼 뭘 쓰냐. 좋은 걸 쓰다가... 나중에 애기 생겨봐라. 애기한테도 좋은 거 해줘야지 어떤 마음이 들겠냐. 아 왜 내가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야 돼?!!! 정적. 왜 이렇게 예민해. 아 뭔 소리만 하면 예민하대.
방을 나간 엄마.
곧 후회가 되어 안방으로 찾아갔다. 부엌에 있는 엄마가 들어오면 애교를 피워야지, 그런 거 아니고 다 건강한 거 찾아 쓰면서 잘 살 거야 엄마 걱정 마 말해야지, 하고 침대 위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할 말을 되뇌었다. 엄마가 들어오더니 곧장 화장대로 가며 쏘았다. 왜 그러고 있어? 가서 자. 입술을 달싹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 말 않고 침대에서 도로 기어나와 방으로 돌아왔다.
다시 내 방. 침대. 엄마, 안 돼. 이러면 결혼식 때 운다.
딸은 아주 신났네. 독립하려고 작정했네. 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결혼한다고 좋지? 좋기만 하지? 차라리 좋기만 하고 아무 것도 모르면 좋으려나. 부모의 속 같은 건 신경도 안 쓰이고 룰루랄라 내 이삿짐 싸고 서방님 내 서방님 노래를 부르면 좋으려나. 나는 엄마의 마음 같은 건 모른다. 겨우 짐작하더라도 그것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서로 언뜻 언뜻 예민함이 느껴지는 시기를 지난다. 축복하는 말로 통과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차라리 눈물이나 왈칵 쏟고 실감할 텐데. 자꾸만 울어야 할 때를 놓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