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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느 Sep 23. 2016

3,

  기다렸다. 형돈이와 대준이를 지나 랩슬리, 인 줄 알았는데 에스페란자 스팔딩이로구나. 얼스 투 헤븐. 이어폰으로 흘러드는 음을 따라 시작하는 문장. 요가원에 가려면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얼마큼과 얼만큼은 늘 헷갈리는데, 얼만큼이라고 썼다가 얼마큼이 맞다고 지적당했던 날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 문제 되었던 낱말이 얼만큼인지 그만큼인지 아니면 다른 비슷한 무엇인지 명확하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얼마큼, 을 쓸 때마다 그렇다. 얼마나 펼쳐볼 수 있을까. 


  신변잡기적인 문장에 그치고 싶지 않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지만 일단 시작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햇살이 따사롭다. 따사롭다는 말은 조금 식상한데 따사롭다, 발음하는 순간 예쁘다고 느낀다. 예쁘다고 느낀다? 예쁘다고 생각한다. 예쁘다는 느낌, 예쁘다는 마음, 예쁘다는 언어, 가 내 안에 든다. 들어온다. 언어가 마음에 들어온다. 언어가 마음에 들다. 들어오다. 낱말이, 언어가 마음에 들어오는 과정. 가령 따사롭다, 같이. 무언가를 보고 우리는 언어를 떠올린다. 무언가를 보고, 무언가를 듣고, 느낄 때 언어가 마음으로 들어온다. 언어화되는 눈 앞의 것. 언어화되는 소리. 언어화되는 느낌. 너희는 어딘가 억울하지 않을까. 구둣점을 물음표로 바꾸고 싶다. 구둣점이란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문장을 쓰다 보면 드는 생각. 지금 잘 쓰고 있나. 지금 무슨 말을 쓰고 있는 거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딱히 하고 싶은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문장에 그저 끌려가는 시간이 내게는 필요하다. 왜? 무언가를 늘 규명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에 시달리곤 하는데, 떨쳐내려 애쓴다. 불안함을 밀고 나가는 힘이 필요하다. 어떤 주문 같은 것을 스스로에게 주입하기도.


  내면의 생각을 따라가기보다 당장 눈앞의 문장을 따르는 사유. 그런 문장. 다시 문장에 집중해야 한다. 머리가 해대는 생각 말고, 따라가야 할 것을 잘 따라가야 한다. 분별이 쉽게 되다가도, 흐름을 놓치곤 해. 더 집중이 필요한 까닭이다. 큰 차이는 재미다. 그대로 따라가야 할 길을 따라가면 재미가 있는데, 머리가 먼저 움직여버리면 재미가 없다. 문장에 끌려가는 글. 그저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을 쏟아놓는 문장 말고, 앞문장에 사로잡혀 끌려오고 마는 뒷문장. 그 뒷문장이 내게 와야 하는데. 낚시 같다. 조바심을 내다가는 그런 뒷문장은 오지 않을지도 몰라. 아마 그러기가 쉬울 것이다. 


  오늘도 오웰을 읽는다. 이따가 전철에서는 박솔뫼를 마저 읽을 것이다. 우선 핸드폰을 들고 모바일청첩장을 몇에게 보낼지도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이라지만 나는 아마 보낼 것이다. 앞의 읽기보다 핸드폰을 먼저 쥘 것이다. 방금 문장은 이상하다. 다시. 책보다 먼저 핸드폰을 손에 쥘 것이다. 책보다 먼저 핸드폰을 들여다볼 것이다. 왠지 씁쓸하군.


  정작 써야 할 것을 쓰지 않는 기분이 든다. 어떤 기분. 어떤 생각. 어떤 마음. 쫓긴다. 무엇인가에 쫓긴다. 쫓기곤 한다. 가다 보면 막다른 길. 사방에 둘러싸인 벽. 어쩌지도 못하는 너. 주저 앉을 것인가. 아니. 그건 아닌데. 벽이랄 것을 민다. 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앞으로 밀린다. 틈이 생기지는 않고, 계속 앞으로 밀린다. 너의 공간이 늘어나는 셈이다. 가로막혔던 사방이 너의 공간이 된다. 가로막혔던 사방이 너의 공간이 되는 순간, 아늑하다. 너는 너의 공간을 조절할 수 있다. 원하는 벽을 두 팔로 밀면 된다. 마음대로 공간이 줄어들지는 않지만, 너는 네 마음대로 네 공간을 늘릴 수 있다. 줄어들지 않더라도 공간은 스스로 줄어든다. 네 안에 숨어든 어떤 압박감. 그것으로 공간이 줄어든다. 다시 늘리면 되는 너의 공간. 너의 공간은 아늑하다. 


  다시 손이 멈추고, 이미지가 멈춘다. 손이 멈추면 너는 너의 쓰기를 끝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지점이 바로 네가 뚫고 가야 할 몫이다. 그만두지 않는 것. 뚫어야 뚫리는 지점. 끝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을 뚫는 것. 그것이 너를 낫게 할 것이다. 그것만이 네가 나아질 수 있는 길이다. 길. 너는 너의 길을 닦지만, 그 길은 누군가 이미 한 번 닦아놓은 길이다. 주저앉지 않은 너는 바쁘게 움직인다. 서성여도 괜찮다. 찌부되지만 마라. 


  아, 찌부라니. 찌부가 뭐냐. 20분 동안 2000자 정도 썼다. 10분에 1000자. 1분에 100자. 원고지 한 장을 채우는 데 2분. 더 빠르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더 정신없이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손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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