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후배들과 대학원 진학 관련 상담을 하면서 고구마 먹는 느낌을 받는다. 나도 이제 시작하는 입장이라 알려줄 수 있는 게 적어서 답답한 것도 있지만 대개 받는 질문들이 너무 의존적이어서 그렇다. 나도 했던 질문들이지만 고구마 유발하는 대표적인 질문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전 대학원엘 가야 할까요?"
"전 어떤 분야를 연구하면 좋을까요?" 혹은 "연구 분야는 어떻게 정해요?"
이런 질문들엔 뭐라고 답해야 할까? 내 대답은 보통 "네가 알아내야지, 내가 어떻게 아냐?" 혹은 "네가 찾아봐" 정도다. 본인이 미래에 가서나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인데 내가 알 수 있나.
연구 분야 선택 하나로 앞으로의 진로 혹은 심하면 졸업 가능 여부까지 달라질 수 있고, 같은 OO 학 석사 혹은 박사 타이틀을 달고 다녀도 선택하는 분야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 다른 이의 추천으로 인해 본인에게 잘 맞는 다른 분야는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엉뚱한 물에서 놀거나 그만두게 되는 억울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말이다. 연구 분야 소개도 마찬가지다. 사실 나도 사람이라 각 분야들에 대한 생각들이 편향적일 수밖에 없고, 잘못 아는 것들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석사를 넘어 박사까지 꿈꾼다면 이런 질문들이 "전 누구랑 결혼해야 할까요?" 수준의 질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 경험담 하나를 얘기하자면, 내가 속한 학과 대학원은 매년 교수진들 전체가 신입생들을 위해 연구 발표 세미나를 한다.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고, 그 세미나를 참석한 후에 마음에 드는 연구를 하는 교수님들과 각자 따로 미팅을 할 수 있고, 그 후에야 연구실을 선택해서 들어갈 수 있다. 즉 세미나를 통해 전체 교수진을 강제로 한 번씩은 만나게 된다. 세미나를 하시는 교수님들은 연구 설명에 앞서 짧게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주시는데, 교수님들께서 각자 어떻게 대학원에 오게 됐는지 혹은 연구 분야를 어떻게 정하게 됐는지가 단골 이야깃거리다. 이미 입학한 우리들이 듣기에도 재미있고 유익하다.
어떤 교수님은 의학대학원을 가려다 실패해서, 어떤 교수님은 그냥 취업하기 싫어서 또 어떤 교수님은 프로 농구 선수가 되려다 실패해서 대학원엘 갔단다. 교수님들마다 이유가 정말 천차만별이었고, 쉽게 이해가 안 되거나 황당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40여 명의 교수님들이 말씀하신 다양한 이유들 중엔 '누군가의 권유 혹은 추천 때문에'라는 이유는 없었다. 몇몇 교수님들의 대학원 진학 이유들이 정말 희한함에도 불구하고 교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그 길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교수님들의 이야기 끝에 혼자 잘 생각해보라는 얘기가 언제나 따라붙던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떤 길은 남들에게 주워들은 걸로만 가기엔 너무 멀 수도 있고, 어쩌면 기대하던 걸 못 찾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도착한 목적지에는 들어가는 문이 여러 개일 수도 있고, 그중엔 내가 지나온 길 때문에 못 들어가는 문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 수년 후에 내가 잡을 문고리까지 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스스로 길을 선택함으로써 나 자신에게 책임감을 부여하는 정도는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일이 안풀리면 원망할 대상부터 찾는 게 사람이니까. 어떤 분야에 꽂혔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그 길을 가다 보면 누구나 좌절하거나 포기하고 싶어 지는 순간이 있는데 남들이 정해주는 길 따라가는 건 오죽할까. 내 전공이 마음에 안들어 그만두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 분기점에서 속 시원하게 달려 나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역시 내가 결정한 일이고, 난 할 만큼 했다는 믿음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