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원, <세자매>
영화 첫 장면. 어두운 밤, 내복 차림의 두 아이가 손을 잡고 어딘가를 달리고 있다. 도망을 치는 것처럼 다급한 발걸음이다. 아이들은 누구에게서 달아나고 있는 걸까. 영화 종반부 아버지 생일날, 미연(문소리)의 플래시백으로 앞선 장면의 전말이 밝혀진다. 두 자매의 뜀박질은 도망이 아닌, 도움을 청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자매가 찾아간 슈퍼에서 아저씨들은 그들의 신고 요청을 가볍게 무시한다. 그건 둘째 미연이 가부장적인 세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최초의 부조리다. 무력감을 느끼며 미옥과 함께 집 앞으로 돌아온 미연의 앞에 진섭을 안고 있는 희숙이 있다. 희숙과 진섭의 몸은 아버지에게 당한 폭력을 그대로 증언한다. 그때 네 아이가, 특히나 서로를 보는 미연과 희숙이 잃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언어다. 왜 자기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런 일을 당한 이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를 아우를 수 있는 언어가 이들에게는 없다.
설명이 불능해진 상처와 폭력을 가지고 자라난 세 자매는 텅 빈 말을 반복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미연은 모든 것을 주님의 언어로 갈음한다. 심지어 가부장이자 가해자인 아버지에게 억눌린 감정을 처음 폭발할 때마저도, 미연은 자기가 아홉 살 때 했던 기도 내용을 인용하는 종교적인 화법을 통해 가까스로 우회하는 길을 본능적으로 택한다. 진섭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함께 커왔을 희숙(김선영)은 미안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다. 언제나 자신을 을로 격하시키며 미안함과 겸연쩍음으로 모든 상황을 무마하려는 그는, 끝내 '이래 거지 같은 자신'마저 미안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언니들을 가진 미옥(장윤주)의 언어는 한층 일차원적이다. 나는 쓰레기라는 말을 달고 사는 그의 말은 직접적이고 파괴적으로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 이러한 세 자매의 언어는 이들이 각자 어떤 방식으로 생존해왔는지 그 단면을 역설적으로 서술한다.
언어가 무능해진 자리
그러나 세 자매는 각자 그마저도 무력해지는 순간들을 맞는다. 액션으로 주어지는 상황에 대한 리액션으로서 언어가 필연적으로 무능해지는 순간,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의미가 삭제된 비명과 같은 말이거나, 결국 몸이다. <세자매>는 인물들의 심리적 고통이 어떻게 몸을 경유하여 나타나는지를 포착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항상 평정심을 지키던 미연은 남편의 불륜 상대인 효정(임혜영)을 몰래 구타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아버지 생일날 진섭(김성민)의 뺨을 때리는 것도 미연이다. 자해 충동을 가지고 사는 희숙은 자기 몸에 상처를 내며 어디로도 분출할 수 없이 꽉 막힌 마음에 잠시나마 숨통을 틔운다. 처음으로 엄마 역할을 하기 위해 아들의 학교에 찾아간 미옥이 난동을 부리고 구토를 하고 눈물을 쏟는 것 역시 그의 해결할 수 없는 정신적 답답함이 신체적으로 반응하는 순간이다.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 진섭은 어떠한 말도 없이 곧장 아버지에게 가 오줌을 뿌린다. 결국엔 희숙의 암이라는 피할 수 없는 질병에 다다르기까지, 영화는 어떻게 이들의 신체가 폭력의 주체이자 객체로서 대응하고, 그 안에서 유동하는지를 끝까지 추적한다.
이들이 언어와 신체 사이의 불협화음을 겪으며 온갖 불합리를 통과하는 동안, 원가족의 폭력성은 세 자매를 거쳐 다음 세대로 전이된다. 미연네 가족 막내인 하은(경다은)은 집안에서 가장 약자의 위치에 있다. 그가 오빠와 부모에게 받은 신체적, 정신적 폭력은 다분히 위계적이다. 자신을 연애 상대로 보지 않는 상대에게 집착하고, 언어폭력을 일삼는 보미(김가희)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희숙과 그의 권위적인 남편을 통해 조금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다. 가족의 권력관계 안에서 전승되는 폭력성은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시간만큼의 절단면에도 나이테처럼 세세히 새겨져 있다.
특히나 마지막 생일 잔칫날 부모의 등장은 자식들에게 이어지고 있던 세 자매 성격적 결함의 뿌리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미연처럼 목사를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여기던 어머니는, 희숙의 질병을 듣고는 그에게 다가가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반복한다. 영화는 이때 희숙의 얼굴을 화면에 붙잡아놓는데, 그때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 없던 희숙이 잡채를 입 안에 가득 담은 채 어머니의 미안하다는 말에 진저리를 친다. 아버지가 사과 한 마디 하지 않고 유리에 이마를 쾅쾅 찧으며 자해하는 모습에도 희숙은 그 누구보다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지금 언니 눈이 아빠랑 똑같다'는 말을 미옥에게서 들은 미연 역시도. 나의 결점을 부모를 통해 거울처럼 마주하는 순간만큼 나 자신이 무력해지는 순간은 드물다.
부모보다 한 걸음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그러나 <세자매>는 그런 감정만을 무책임하게 쥐여주며 이들을 버려두지 않는다. 우선 반드시 짚어내야 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효정을 두들겨 팼던 미연이 성가대에서 그를 다시 보는 장면이다. 앞서 미연이 효정을 구타하던 당시를 떠올려보자. 미연은 효정에게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쓰라고 말한다. 이는 미연이 자기가 범할 폭력을 직접 마주하길 거부하는 지시다. 하지만 성가대로 돌아온 효정이 얼굴에 시퍼런 피멍이 든 채 울먹거리며 솔로를 부를 때, 미연이 이를 목격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흔들리며 서서히 클로즈업하는 카메라가 담아내는 것은 자기가 저지른 폭력의 결과를 두 눈으로 마주하는 미연의 얼굴이다. 죄책감 때문일까, 눈물을 참는 미연은 곧이어 마음을 다잡고 태연하려 애쓴다. 하지만 이러한 얕은 문장이 미연의 마음에 일어난 파동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그것은 아버지처럼 폭력의 가해자가 되어버린 미연이 아버지와는 다르게 자기 과실을 맞대하는 얼굴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원가해자인 아버지는 결코 지을 수 없는 표정이라는 것만은 말하고 싶다. 세 자매가 원가족의 굴레로부터 아주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만드는 영화적 동력이 바로 이 얼굴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영화 막판 아버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미연의 행동 역시 그 얼굴에서 출발했다고 믿는다.
어른들이 왜 사과를 못하냐는 보미의 분노는 가장 마지막 세대로부터 터진 송곳 같은 일침이다. 자신을 변화시킬 줄 아는 부모는 정말이지 희귀하니까. 그러니 <세자매>에서 놓쳐선 안 되는 장면은 이런 것이다. 새엄마를 욕보였다며 상준(현봉식)이 아들 성운을 때리자, 미옥이 상준을 때리며 도리어 성운을 지켜주는 장면.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는 미옥의 불완전한 행동은 블랙코미디스러운 분위기로 화면 전체를 압도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는 누군가를 지킬 신체적 힘이 생긴 미옥이, 자식에게 쓰는 폭력에 집착적으로 반대하며 어떻게든 그것을 저지하려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영화가 끝나고 돌이켜 보면 한층 뭉클한 광경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기 부모보다 한 걸음만큼만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에 성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면서도, 영화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끝내 설득해낸다.
그러니까 사과를 하라는 미연의 커다란 외침과 사진을 찍자는 희숙의 작은 부탁 같은 것들. 그것은 다시 말해 왜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를 따져 묻는 항변의 언어이자, 이런 일을 당한 우리가 조금 더 '우리'로 함께 있자는 간청의 언어다. 이들은 그렇게 가장 폐허의 자리에서 새로운 언어를 직접 찾아냈고, 잃었던 언어를 조금이나마 회복해냈다. 앞으로도 세 자매는 정말이지 부족한 부모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 가족은 똑같이 가혹하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겠지. 하지만 영화가 건져낸 일말의 언어, 딱 그 정도의 양만큼 이들은 건강할 것이다. 이들의 몸은 그만큼의 괴리만큼은 받아내지 않아도 될 테니까. 영화에게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다. <세자매>는 긍정하기에 충분한 영화다. (202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