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만화책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는 BL(보이즈 러브) 만화에 입덕한 75세 할머니 이치노이 유키와 그를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한 입덕 선배인 17세 소녀 사야마 우라라의 우정 이야기를 그린다.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거야>라는 책의 서문에서 알게 됐다. 덕후로서 깊이 공감했다는 글을 보고 어떤 만화책인지 궁금해졌다. 도서관에 책이 있는지 검색해봤다.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있어야할 위치에 책이 없었다. 사서에게 물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버젓이 도서가 DB에 등록돼 있는데 책이 없어진 경우는 드문 듯했다. BL 소재에 지레 겁먹은(?) 내부 인력이 폐기한 걸까. 그렇다면 정말 센스 없고 재미없는 사람들이다. 누구 일진 몰라도 만화책 속 할머니보다 따분한 일생을 살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한 번의 타이밍을 놓치고 못 읽고 있다가 3월 '할머니' 주제를 쓰기로 하면서 친구 푸푸푸가 먼저 이 책을 권해서 읽게 됐다. 덕질 좀 해본 사람이라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두근두근할 만화책이었다.
덕질에는 나이가 없다. 무언가에 크게 '치이는' 순간 우리는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우연히 BL 만화를 접한 할머니의 세계는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현실에서는 75년을 살았지만, 새로 치인 BL 만화 덕후 세상에서 할머니는 입덕 선배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아직 그 작품을 못 본 눈'을 가진 아기일 뿐이다. 회사나 학교에서 만나는 선배와 달리 덕후 세계에서의 선배들은 무척이나 친절하다. 할머니는 덕질 세상에선 인생 선배인 소녀를 통해 풍요로운 덕질 꽃길을 전수받는다. 홀로 살던 자신의 집의 툇마루에서. 내게도 그런 공간이 있다.
2019년 8월 7일,
영화관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나는 덕질이 곧 생애 주기인 사람이다. 이 날은 덕질 생애 주기에 지각 변동이 온 순간이다. 10년 남짓한 세월, 이 세상 좋은 드라마와 영화는 다 씹어 먹겠다는 일념으로 세상 수많은 콘텐츠를 뿌셨다. 작품마다 여러 배우들을 돌아가면서 덕질하고, 급기야 드라마와 영화에 대해 쓰는 기자가 돼 덕업 일치를 이룬 지 4년 차. 덕통 사고가 크게 나버린 것이다. 그것도 X-덕질(구 덕질)의 현장인 영화관에서 말이다.
<브링 더 소울: 더 무비>를 봤다. 그날 영화관에서 내가 이 영화를 끝내주게 재밌게 봤나. 돌이켜보면 그건 또 아니다. 그때의 난 아직 멤버 이름과 얼굴도 제대로 매치하지 못했다. 다만 1년 남짓 방탄소년단의 LOVE YOURSELF 앨범만 닳도록 들었을 뿐이었다. 멤버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정신없는 편집을 따라가느라 영화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알게 모르게 내게 위로가 됐던 그들의 가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방탄소년단 그들의 삶에서 직접 건져 올린 것이었음을 확인한 순간, 나는 완전히 무장해제됐다. 내겐 너무 익숙하지만 지겹고 힘겹게 느껴지기도 했던 영화관이라는 공간에서 과거의 덕질이 지고 새 덕질의 시대가 열린 순간이었다. 동시에 앞으로 보게 될 세상 모든 영화와 드라마가 시시해져 버릴 것을 암시하던 순간. 하필 나는 이 영화를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영화관에서 개봉일 저녁에 봤다. 영화 개봉일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선배 아미들 속에서 한 애기 아미가 탄생했다.
2019년 10월 27일
잠실 주경기장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영화를 본 그날 밤부터 유튜브 알고리즘에 몸을 맡긴 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이어졌다. 밤새 무언가를 보고 씹고 뜯고 맛보는, 그간 쌓아놓은 덕질 체력과 공력을 발휘할 때다. 방탄소년단의 한 달 휴가 기간 동안 그들의 지난 6년의 서사를 정말 열심히 따라잡았다. 데뷔 6년째 처음 휴가를 받을 정도로 열일한 방탄소년단이니 얼마나 봐야 할 게 많겠는가. '방탄 덕질은 그동안 모든 덕질의 총합이다'라는 격언을 만들고 싶을 정도로 그 세계는 방대했다. 음악, 다큐, 판타지, 서사, 예술, 메시지, 시대정신, 청춘, 노력, 결실, 잘생김, 귀여움, 슬픔, 기쁨, 위로, 공감, 진정성까지 두루 갖춘 콘텐츠의 총체였다. 그래서 팬들 중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덕질 한가닥 찐하게 해 본 만렙들이 많이 모였다. 그들도 역시나 하나같이 이곳이 종착역이라고 말한다.
이젠 생 눈으로 그들을 보고 싶었다. 나는 왜 영화 기자고 그들은 왜 연기를 안 하는가. 한탄스러웠다. 그래도 콘서트가 있다. 하지만 방탄소년단의 콘서트 포도(좌석)는 절대 없기로 유명하다. 나 같은 초짜가 그 치열한 티켓팅에서 성공할리 없다. 이변 없이 대실패. 같이 입덕 한 동생이 지인 찬스로 표를 하나 얻었을 때는 나만 못 갈까 봐 더 초조해졌다. 그러나 포기는 없다. 끈기와 집념을 발휘해 시도 때도 없이 취소표가 생겼나 기웃거렸고, 마침내 우연히 일찍 눈을 떴던 어느 주말 새벽 6시, 기적적으로 하나 남은 취소표를 건지고 만다.
그 날의 열기와 들뜸은 아직도 생생하다.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앉은 3층 관객석. 방탄소년단 일곱은 일곱 개의 면봉으로 보일 정도로 먼 거리였다. 그러나 세기의 발명품 망원경만 있으면 그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다만 망원경은 하나, 내 눈은 두 개, 방탄소년단은 일곱이라는 단점이 있어서 공연 초반 그들의 움직임을 놓칠까 초조해했다. 그러다 어느새 에라 모르겠다. 묵직한 망원경은 목에 건 채 덜렁거리게 내버려두고 방방 뛰고, 소리치고, 응원법과 노래를 외쳤다. 3층에서 바라본 색색의 응원봉은 장관이었다. 그 반짝이는 응원봉 무리에 숨어 처음 나를 내려놓아봤다. 그 모든 순간이 좋아서 찔끔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들이 '생명을 깎아가면서' 한다는 무대는 생명력으로 펄떡였다.
이틀 후, 서울 파이널 콘서트 마지막 날, 표가 있던 동생을 따라 겉돌(콘서트 바깥에서 공연장을 돌면서 소리만 듣는 것)을 했다. 추운 가을밤, 자리 없이 바깥에서 조금씩 삐져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지만 팬들은 그 마저도 즐긴다. 다행히 마지막 불꽃놀이와 드론 쇼는 겉돌을 하는 아미들도 함께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순간이다. 콘서트의 끝 곡 '소우주'에 맞춰 움직이는 드론 쇼를 보며, 앞으로 이 덕질을 기꺼이 온몸으로 즐기리라 다짐했다. 콘서트가 끝나고 동생과 동생의 표를 구해준 친구와 그 친구의 사촌 동생과 함께 근처 술집에서 뒤풀이를 했다. 그날의 콘서트로 만난 기묘한 인연이었다. 처음 본 사이였으나 콘서트의 행복감만으로 스스럼없던 시간이었다. 다른 테이블과 그 날 공연장 근처의 길거리, 술집 전부 그런 분위기였다.
3층 공연장에서 나는 정국이 최애인 내 또래의 아미와 인종이 다른 남자 아미 사이에 앉았었다. 겉돌 하던 날, 내 앞에 함께 길바닥에 앉아 있던 아미들 역시 외국인들이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 모든 게 처음이었던 나는 그 반짝이는 순간을 앞으로도 자주 마주할 생각에 두근거렸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에서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할머니는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책 시리즈 연재 중에 죽으면 어떡하지 고민한다. 어릴 적 한창 드라마와 만화책을 즐겨보던 시절, 나도 결말까지 못 보고 내가 갑자기 죽으면 어쩌지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한 적 있다. 그때도 오래오래 덕질하다 좋아하는 것을 다 보고 다 늙어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래의 방탄소년단 덕질을 하려면 나는 지금 어째야 하는가. 코로나가 끝나고 열릴 공연에서 그들의 텐션을 온몸으로 함께할 체력이 필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방탄소년단 노래를 들으며 달린다. 언젠가 있을 방탄 디너쇼에서도 할미로 놀아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