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NG Oct 12. 2021

전형적인 서사 속 비주류 인물들이 빚어내는 <승리호>

그동안 우주 영화 속 주인공은 주로 백인이거나 남성이거나 가족이 있는 가장이거나 전문가거나 인간이 아닌 생명체였다. 그들은 대부분 영어로 말하며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처럼 비장하거나, <퍼스트 맨>처럼 우주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발견하고자 하거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처럼 은하계를 구하거나. 그러나 <승리호> 주인공들의 삶에는 선택지도 목적도 없다. 아무 데도 설 자리가 없어서 그저 우주를 떠돌고 있을 뿐이다.

<승리호>는 그동안의 할리우드 스타일의 서사 구조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듯 보이나 조금씩 예측을 비껴간다. <승리호>의 가장 전형적인 캐릭터는 주인공 김태호(송중기)다. 그는 기업체의 촉망받는 엘리트 파일럿이었으나 현재는 잃어버린 7살 딸의 시신을 찾기 위해 돈이 필요한 아빠다. 어디서 많이 본 캐릭터 설정이다. 그러나 좀 더 파고들면 그렇게 전형적인 것만은 아니다. UTS의 첫 번째 입양자가 되어 소년병으로 길러지기까지 김태호에게 삶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인간들을 사살하는 임무 중 만난 여자아이 순이를 자신의 딸로 삼은 순간이 유일한 ‘선택’의 순간이었다. 아이의 죽음 이후, 그는 다시 무력하게 살아간다. 물론 딸의 시신을 되찾을 때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우주 쓰레기를 줍긴 하나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분노하기보다는 무력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김태호 외 다른 인물들은 설정부터 비주류다. 여성, 아이, 목소리는 남성이지만 여성 정체성을 지닌 인공지능, 다국적 언어를 구사하는 인물들이 있다. <승리호>에는 이렇게 다른 SF 영화에서 볼 법한 전형적인 특성을 보인 인물과 그런 영화에서 보기 드문 인물들이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승리호>는 비주류와 주류 이야기 사이를 줄타기 하는 느낌이다. 줄 위에 올라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한다기보다는 전부 다 올려놓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생각해보면 조성희 감독의 전작들 <늑대소년>,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역시 그랬다. 주인공은 초반에 항상 뻔한 설정에 뻔하게 흘러갈 것처럼 굴다가 언제부턴가 예측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반전이라기보다는 흐름의 전환이다. 그 판을 뒤흔드는 키는 언제나 영화의 조연으로 등장하는 ‘아이’ 캐릭터에 있었다. 언제부턴가 영화는 ‘아이’의 시선에서 보는 것처럼 전개되는데 그때부터 이야기의 스케일은 작아지고 캐릭터 개개인에 대한 층위는 두터워진다. <늑대소년>에서는 늑대소년과 소녀의 판타지적인 사랑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소녀의 어린 동생들과 가족을 이루며 성장하는 이야기로 흘렀고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역시 탐정의 짜릿한 추리 과정에 집중하기보다는 탐정 옆에 함께 하는 아이와의 교류로 어른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극이 진행될수록 전형적인 인물들은 점차 허술해지고 비전형적인 인물들이 극을 지배한다. 

<승리호>도 비슷하다. 김태호와 악역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 구도는 지극히 클리셰적이다. 특히 악역의 설정과 행동 방식은 뻔하고 싱겁게 그려져 그다지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지 못한다. 영화가 긴장되는 순간은 꽃님(박예린)의 움직임에 달렸다. 꽃님이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나타나는 순간, 재채기하거나 방귀를 뀌기 직전이다. 극중  캐릭터들의 변화도 꽃님이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비주류 인물들이 힘을 모아 절대 악을 물리치는 전형적인 서사를 기대했던 관객은 실망할 수 있는 전개 방식이다. 물론 <승리호>는 이런 것도 보여줬다. 할리우드 SF 영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예산으로 할리우드 못지않은 퀄리티의 우주 세계관을 구현했고 업동이(유해진)의 액션신 같은 스펙터클한 장면도 있었다. 이렇게 전체 플롯은 전형적인 문법을 따랐다. 다만 그 안 구성원들의 캐릭터를 통해 변화를 꾀했는데 이 두 장치가 동시에 벌어지면서 보는 사람에게 묘하게 새로운 느낌이 들게 한다. 한 나이지리아 시청자는 자국 영화가 아닌 다른 나라 영화에서 자신의 나라에서 쓰는 ‘피진’ 언어가 나온 것은 처음 본다며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신선 했다고 평했다. 엉성한 절대 악역과 디테일한 설정을 지닌 조연이 한 세계 안에 있다. 때로는 그 조연의 한마디가 영화의 다른 맥락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예다.

<승리호>가 나오기 직전 이미 국내 출판계에서 SF 장르 열풍이 불었다. 가장 주목받은 작품은 김초엽 작가의 SF 단편 모음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었다. 그의 소설엔 할머니 과학자가 있고 도서관에서 유실된 엄마의 기록을 찾는 딸이, 언어를 알지 못하는 갓난아이의 이야기가 있다. 근미래를 그리지만, 그 안의 인물과 상황 설정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그곳에 사는 주인공들은 흔히 영화에서든 영화 밖에서든 주류에 속하는 인물들은 아니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현실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도, 드넓은 우주 세계 속에서도, 일부 구성원들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승리호>의 뻔한 이야기 속에서 느껴지던 이질감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 산산조각 난 희망 속에서 조각 맞추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