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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준 Apr 16. 2024

사슬에 묶인 자유의지

알레프의 파도 앞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그에게서 그가 살아갈 미래를 보며, 도대체 왜 태어났는지 생각해보며, 도저히 응원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 도취하여 있었고, 그 감각은 그를 다시 위험한 도박판으로 내몰고 있었다.


나는 그를 대양의 폭풍을 이겨낸 대범한 소녀라 생각하고 만났지만, 실제로 만난 그는 부서진 선박의 잔해들과 함께 이곳으로 떠밀려온 그저 살아남은 자였다. 내가 살아가는 국가에서는 그와 같이 풍파에서 떠밀려온 사람들을 사회의 지배층으로 만드는 관습이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그 운명을 소녀는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 국가는 지금까지 15세대 정도의 세월을 거치며 그러한 자들을 통해 의지를 남발했다. 전 세계를 지배하고 쪼그라드는 역사를 반복했다. 분명히 이 소녀는 쪼그라드는 미래를 앞둔 자들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 얹혀두기 좋은 "과거"의 유산이 될 것이다.


그 소녀를 만났을 때, 나는 옆의 뛰어노는 소년을 보았다. 소녀는 그에게 어떤 눈길도 주지 않았다. 소녀에게 뛰어노는 소년은 보잘것 없었다. 소년은 해변 근처에 살며 가족과 지긋지긋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 가족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의 집에서 눈길 줄 것이라고는 15년 전 그의 부모가 쓰러져가는 누군가를 살려내 마을에서 이달의 영웅이 되었다고 적힌 지역 신문사의 기사뿐이었다.


물론 나는 소년 앞에서 그의 부모가 대단하다고 치켜세웠지만, 자랑할 게 매일 찍히는 동네 신문의 아주 오래된 기사가 전부인 그의 가족에서 딱히 큰 감흥을 받지 못했다. 아마 살아남은 소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소년을 밤의 귀뚜라미 소리와 같은 있으나 마나한 배경의 일부처럼 취급하고 무시했던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소녀에 대한 내 소감을 말하기 전에 내가 왜 그 소녀를 만났는지, 그리고 처음에는 그 살아남은 소녀에게 이렇게 염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음을 알려줘야겠다. 나는 그와 같이 살아남은 자였다. 그 성공에 도취하여 이 사회의 지배층이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몰려드는 허무함에 지위를 버리고 군중 속으로 숨었다. 가족과의 연까지 끊으니 내게 남은 것은 없었다.


해방감의 자유를 느꼈다. 그 구원의 손길, 나를 대양에서 이 해변으로 이끈 그 손길이 또다시 나를 이끌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내 정신이 만들어 낸 거짓일 뿐. 실제로 그 모든 현상에는 그 어떠한 이유도 없다. 일어났기에 일어났을 뿐이다.


과연 인간 이성의 힘을 믿는가? 그것은 그저 합리화를 할 때만 유용한 분쇄기다. 모든 쓰레기가 분쇄되어 같은 모양을 가지고, 그 조각들을 쌓아 우리는 피라미드를 만든다. 그 피라미드는 결국 쓰레기의 재활용일 뿐이며, 그렇게 인간은 무의미함을 무의미함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세상에 그 어떠한 목적도 없으며, 심지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40년 남짓의 미약한 이성만 유지할 수 있는 이 유인원이 알아내기에는 너무나 원대한 임무다. 이 유인원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은 유출된 빙산과도 같다. 빙산은 1/8만을 밖으로 내뱉고 7/8을 바다에 적시는데, 나름 포함한 이 유인원은 1/8밖에 생각하지 못하며 자신의 7/8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는 우리를 이렇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바다에 적셔진 정신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아직은 요원하기만 하다. 소녀의 자아도취는 자신의 운명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단계, 과거의 내가 지나친 단계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부디 나처럼 늦지 않게 제정신을 차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무엇이 나와 소녀를 해변으로 이끌었으며, 이 사회의 지배층이 되도록 도왔으며, 가장 중요하게 무엇이 나에게 이러한 지성을 주었을까? 바다에 적셔진 우리의 정신은 이에 대한 최상의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유추한 최상의 답은, 당신이 이 글을 읽게 된 계기와도 같다. 왜 이 글을 어떻게 읽게 되었는가?


어제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오늘 아침에 무엇을 먹고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이 이 글을 읽도록 선택하게 했는가? 당신의 의지가 발휘할 선택을 내리게 만든 이 장소는 무엇이 마련한 것인가? 그 답은, 없다. 그저 그럴 뿐이다. 합리화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그 답은 항상 없다. 없고 없고 없다. 이 세상은, 그저 태초부터 이렇게 지어질 운명이었고 이 현실에 도달할 운명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를 현재로 이끈 힘에 대하여 그저 그럴 뿐이라는, 나 자신의 무지를 확인시키는 답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사회의 상식과 운명을 거부한 나의 도피는 무엇인가? 내가 안정된 지배층의 삶을 버리고 여기까지 온 이유, 그것조차도 운명에 종속되는가? 그렇다. 나에게는 자유가 없다. 내가 다른 정자들을 무찌르고 태어나고, 누구누구와 비교당하며 성장하고, 바다를 건너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 이 모든 것들은 그냥 누군가 대신 했을 역할이다. 내가, 지금 이 생각을 생각하는 내가 그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방금 구조된 그 소녀이다. 그리고 이 생각을 생각하는 자는 머지않아 이 소녀가 맞닥뜨릴 모순의 첫 장이다. 바로 이 사슬에 소녀는 묶였고, 오직 다른 우주에서 태어나는 것 말고는 도망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내 얘기를 한 게 아니다. 이건 바로 당신의 이야기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삶이 끝났다. 바로 거기에도 새로운 시작은 없다. 오로지 무의미를 무의미로 대체하며 살아남는 것 뿐만이 유일한 선택지다. 그래도 이 글이 소정의 목표를 달성했기를 바란다. 바로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


청주에서

202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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